한국일보

사랑과 자학의 화가

2006-09-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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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막연하게 지내던 여류 수필가 H의 집에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다 우연히 한쪽 벽에 걸린 손바닥만한 그림을 발견하였다. 이중섭이었다. 까맣게 잊어버린 그 불우했던 화가의 아픈 삶이 떠올랐다.
그림이 거기에 걸린 이유가 궁금해 알아보니 친구의 남편과 이중섭의 친조카가 둘도 없는 사이였다고 했다. 두 사람은 고향 원산에서 학교도 같이 다니고 피난도 부산으로 같이 갔다고 했다. 그림은 그 조카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었다.
이중섭의 조카는 그간 이중섭 그림들의 진위 논란으로 마음 고생이 많았겠지만 어찌했든 이중섭 화가 덕에 잘 살고 있다고 친구 남편은 귀띔해 주었다.
이중섭(1916~1956)은 평양에서 출생했다. 일본 도쿄문화학원 미술과에 재학중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에 출품하여 태양상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에 있었다. 일본에서 열렬하게 연애를 했던 일본 여자 마사코는 이중섭을 만나기 위해 혼자 현해탄을 건너 원산에 왔다. ‘이남덕’ 이름을 지어준 이중섭과 결혼하여 세 아이가 태어났으나 큰 아이는 디프테리아로 잃고, 태현, 태선이 두 아들을 두었다.
이중섭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로 활동했으며 신사실파 동인으로 참여했다. 1951년 가족을 데리고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건너간 이들은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 바닷가에서 잡은 게로 연명했다. 네 가족이 발을 뻗지 못하고 지낸 그 방에는 백열등 하나가 지금도 이중섭의 영정을 지키고 있다.
계속되는 생활고로 마사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고, 이중섭은 직장도 없이 아는 문인이나 친구를 만나면 몇 푼의 막걸리 값을 얻어 동가식 서가숙하며 살았다. 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주변의 사람들도 자유분방한 화가를 아끼는 분위기였다.
예술이란 자기 사랑과 자학의 양극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이중섭은 참혹한 상황에서 그림을 그렸다. 판잣집에서도 찻집 골방에서도 콩나물 시루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부두에서 쉬다가도 그렸다. 합판이나 종이 담뱃갑 은박지에도, 물감과 붓이 없으면 연필로 못으로, 잠잘 곳도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다.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으로 장기간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으며 기인이기보다 폐인에 가까운 상태로 삶을 마쳤다.
가난하기만 했던 그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상처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두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던 약속을 못 지킨 아빠의 심정, 돈이 없어 아내 곁으로 갈 수 없던 절박한 상황, 아내에 대한 그리움 등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가슴 절인 그림을 곁들인 편지들이 오갔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미남 화가. 그 시대의 비극적 결혼. 이해할 수 없는 질투와 동경과 안타까움과 가난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내가 만일 이중섭 같은 재능을 타고났다면 그의 삶처럼 오직 그림만 그리고 살았을까? 그림 한 자락에 슬프디 슬픈 삶을 그려 넣은 그의 생애의 파편을 멍청히 나는 바라본다. 예술가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눈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신 헬렌 화가·시인> Helenshin21@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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