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쾰른의 젊은 한국 예술가들

2006-09-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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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남편의 워크숍 강연을 따라 독일 쾰른에 갔을 때였다. 그곳 미디어아트 아카데미의 무어 교수가 라인강을 거닐다가 다리 하나를 가리키며 들어가자고 했다. 그 안에 미술전시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강 한쪽의 입구로 가니 별 표시도 없이 독일여자가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한국산 건빵을 먹고 있어서 반가움을 표하니 건강식이라서 많이 먹는다며 활짝 웃었다. 철물이 드러난 계단 몇 개를 엉거주춤 오르니 마치 동굴 초입처럼 생긴 입구가 나왔다.
안에 들어가니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무어 교수의 하얀 셔츠만 형광 빛을 발하며 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도대체 뭘 전시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아이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타났고 여기저기서 푸른 형광 불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모두 나가자 10여 미터 넓이의 동굴이 다시 캄캄하고 적막해졌다.
그때 무어 교수가 이제야 알겠다면서 큰 소리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바닥에 수직으로 선 긴 형광등들이 다시 번쩍거리다 사그라졌다. 이번엔 우리도 같이 힘껏 손뼉을 쳤다. 1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선 수십 개의 형광등 무리가 동시에 빛을 발하니 장관이었다.
출구는 또 다른 동굴의 입구였다. 그곳엔 소형물체가 얹혀진 슬라이드 프로젝터 몇 개가 곳곳에 놓여져 겹겹의 빛을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움직이는 우리의 그림자도 그 일부가 되면서 동굴 전체가 괴기한 빛의 작품을 이루었다.
그 출구 역시 또 다른 동굴의 입구였는데, 그곳엔 잠수함에서 볼 수 있는 구부러진 망원경이 서 있었다. 망원경 속의 겹겹의 거울을 통해 다리 밑 광경을 보면서야 우리가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 있음을 알았다.
동굴을 되돌아 나오다 보니 시멘트벽에 간간이 난 작은 구멍으로 발 밑의 라인강이 보였다. 다리 속의 전시실, 그 특성을 이용한 소리와 빛의 작품들 등 독일인들의 기막힌 창의력에 은근히 기가 죽어가던 터였는데, 발목을 휩쓸어가는 듯한 파도를 보니 더욱 그랬다.
그날 저녁 TV 뉴스를 볼 때였다. 앵커맨이 바로 그 전시실에서 건빵 먹던 여자를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닌가! 그녀가 슬라이드 프로젝트 작품의 작가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그랬듯, 호텔 방 창문 바로 앞에 보이는 그 다리 역시 아무런 치장 없이 그저 보통 다리인양 천연덕스럽게 서 있었다.
다음날 저녁 워크숍 뒤풀이에 들렀더니 쾰른 대학과 미디어아트 아카데미의 교수, 졸업생, 대학과 대학원생 10여명이 있었다. 우연하게도 학생들의 반이 한국인이었다. 미디어아트 분야로 이름난 쾰른 시의 두 대학에서 교수들의 애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2년 전 졸업했다는 김윤철씨는 설치미술작가로 한국, 독일 외 스페인, 중국 등에서 작품전을 한 유명인물이었다.
모두와 헤어진 후 무어 교수가 자신의 사무실로 가자고 고집했다. 학생작품을 절대 구입하지 않는데 예외로 사들인 김윤철씨의 작품을 꼭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작가의 얼굴이 담긴 JPG 파일의 컴퓨터문자 수만 개를 손으로 베낀 것으로 그 인내심에 존경심이 절로 생겨났다. 첨단 기계기술을 통해 눈에 보여지는 형상의 참모습을 최저의 기술로 표현하면서 많은 메시지를 던졌다. 70년대 그룹 ‘슬랩 해피’의 멤버로 2001년 일본에서까지 성공적 공연을 가졌고, 핑크플로이드의 노래 일부와 현대 오페라 일부를 작곡하는 등 실험음악계에 꽤 이름이 알려진 무어 교수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의 창의력을 칭찬했다.
사무실을 나서며 그에게 한국 전통실내음악과 판소리 CD를 주었는데 누구에게 주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자랑스러울 수 있었다.

김보경 북 캔터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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