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밤이 오고 나서야

2006-09-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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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인 직업이 성업중 이라는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남자가 없이 혼자 사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갖는 직업인데, 그녀들의 사생활 내면에 비어있는 남편의 자리에 고용되어 대리 남편노릇을 하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단 육체 관계만은 제외된다는 계약의 조건이 붙는다고 했다.
사람은 자기 중심이어서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이해력의 폭이 넓지 못하다. 내가 처음 신종직업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는 혼자 사는 여자들의 삶 속에 아픔이 동반한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해 그 범주 밖에서 비판을 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집안 살림을 혼자서 꾸려가면서 남자의 손길이 닿아야 해결될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 터져 나올 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경험하고서야 그 신종직업을 가슴으로 이해할수 있었다.
요즈음 들어 내 살림살이 중에 자꾸만 나를 심란하게 하며 망가져 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시간이 모든 것을 낡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장나는 문짝, 똑똑 물이 떨어지는 망가진 수도꼭지, 덜컹거리는 세탁기… 손을 쓰지 못한 채 그들의 망가짐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면서 누구를 찾아 수리를 부탁해야 하나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은 남편의 부재를 예리한 통증으로 확인 시켜준다.
생전에 남편은 엔지니어여서 전기제품은 물론 자동차 정비에 이르기까지 고장 나고 망가져 수리해야 하는 일에는 별걱정이 없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고 알려만 주면 남편은 기술을 발휘하며 고장난 물건들을 수리해 다시 쓸모 있는 물건이 되게 해주곤 했다.
생전에 남편의 휴가는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휴가였다. 남편은 자신의 휴가를 ‘Honey Vacation’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여보, 이것 좀. 저것 좀” 하는 아내의 수리주문을 받아 땀 흘리며 집안 일을 하는 외로운 봉사의 휴가라는 뜻이었다.
사람은 없어봐야 그 빈자리를 안다고 한다. 그 사람의 빈자리가 드러나면서 다가오는 서글픔과 불편함 그리고 그것은 그리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남긴 빈자리의 넓이와 깊이로 가늠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자가 혼자서 집안살림을 주도하고 이끌어 갈 때 전혀 훈련이 안된 분야, 수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도움의 손길을 절실히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기계 문명 속에 살면서도 기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여자들이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고장이라도 더 낼 것 같으니 천상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논리이다. 믿고 맡길 신탁인이 필요한 것이 혼자 사는 여자들의 쓸쓸한 생존법이다.
겉은 멀쩡하고 번듯한데 속이 비어 있는 것이 ‘속 빈 강정’이다. 혼자 사는 여자들의 삶이 속 빈 강정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밤이 오고 나서야 가로등의 고마움을 안다고 하는데, 지금 바로 내가 그렇지 않은가.

김영중
크리스천 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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