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목사(뉴저지 베데스다교회)
지난 8월 초의 혹독한 더위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얼마나 힘든 땅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기간이었다. 어떤 분들은 지구의 위기가 가까이 도래하고 있다는 불길한 말을 하기도 한다. 20세기 이후 지구를 착취하고 돌보지 않은 인간들의 탐욕이 지구를 둘러싼 대기와 환경의 파괴를
가져왔고, 멀지 않은 때, 그 두려운 대가를 치루리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때, 지구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불안을 더해 주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종교는 이 세상과 삶을 위기로 정의한다. 무릇 종교가 묘사하는 삶과 세상은 항상 부정적인 것들(negativities)을 깔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생노병사의 허무한 과정으로 묘사한다. 사실 인생이란 태어나서 그 젊음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잃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 아닌가? 건
강을 잃고 초췌하게 살아가는 나이 드신 분들을 보면 우선 마음이 아프다. 그들에게도 젊고 건강했던 시절이 없었던가? 우리도 머잖아 그때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불교는 또한 모든 것을 망상(illusion)이라고 말한다. 오감으로 보는 것은 사실 없는 것의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식
속에는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독한 직관과 허무성이 베어있는 가르침이다.
기독교에서 묘사하는 삶도 허무와 고통을 말하는 점에 있어서 공통적이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체험했던 솔로몬 왕의 첫 고백이 “헛되고 헛되고...헛되다”(전1:2)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탄식과 고통 속에서 구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롬
8:22-23). 고통스러운 탄식은 일부 불행한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탄식소리라는 것이다. 더위 속에, 추위 속에, 가정 속에, 직장 속에 이 탄식은 낯선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삶의 여건이 몹시 힘들 것을 말한다. 일례로, 장차 하
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라고 말한다(계6:6). 하루 기껏 일하고 벌어 드린 소득(한 데나리온)으로 겨우 밀 한 되를 사게 된다는 말씀 아닌가? 앞으로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든 여건을 살게 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런 부정적인 묘사 속에서도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6,17). 이로 볼 때, 기독교인의 삶은 인간의 경험과 지혜에 근거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기독교인 삶의 독특성은 나 자신과 세상 밖의 존재, 곧 하나님에게 삶의 근원을 찾는데 있다. 우
리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위기와 부정을 이기는 힘과 자원을 찾는다. 그는 우리의 의와 생명이 되신다. 그는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시다. 우리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를 주목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빛을 찾는다. 마치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을 바라봄으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 될 뿐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셨다. 그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늘 성부 하나님을 의존했다(요6:57). 또한 그는 성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요8:29).
이 두 가지 삶은 곧 “존재의 수단과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 결과 그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될 수 있었다(히1:3). 모든 세상의 죄와 고통은 그 안에서 의와 생명과 기쁨으로 바뀌었다.
삶의 긍정은 바로 우리의 삶의 자원과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데 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존재의 순간순간을 의존해서 살도록 지음 받았다(요15:5-6). 피상적으로 들리는 이런 말이 믿음과 실천을 통해 그 진실성을 체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오늘과 내일, 세상은 항상 위기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이기는 긍정의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르는 데 있음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