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별의 서정

2006-08-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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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정착한 후 해를 몇해 보내고 나서야 그리던 고국 땅에 달려왔다. 오랜만에 반가운 옛 모습들이 가슴에 적셔 온다. 보고싶은 산하. 그리운 사람들. 조그만 찻집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한강에 불빛이 찬란하다. 힘겹던 시절들은 강물에 멀리 흘러가 보이지 않고 유수 같은 세월만이 도시 속을 휘돌아 은은히 흐른다.
고국에서의 하루는 설렘의 연속이다. 그동안 잊혀진 모습들이 반갑게 얼굴을 내밀며 반겨준다. 보슬비 내리는 혜화동에서의 극적인 만남. 반세기전의 빛 바랜 사진 한 장으로 감격에 겨워 울먹이던 옛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모든 설렘을 두고 내일이면 떠나가야만 한다. 이별이란 가슴에 이는 슬픔이기에 벌써 눈시울이 젖어온다. 동서의 양과 고금을 통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백미들이 세월 속에 떠밀려 많이 회자되었다. 그중 여조 정지상의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더하였다는 애절한 시와 이별을 서러워하는 고희 퇴계의 한강물 떠다가 벼루에 부어 썼던 절절한 시편을 비교해보면 가없는 회포가 서려 있다.
퇴계의 시상은 물을 매개로 한 점에서 지상과 일맥 상통한다. 퇴계가 한강 물을 벼루로 갈아서 먹물로 사용하여 붓끝으로 전부 증발시키겠다는 시상과 지상의 이별의 눈물이 더해져 강물이 불어나게 됨을 노래함은 묘한 조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별의 눈물로 불어난 강물이 한을 읊조린 시를 적는 벼루 물로 쓰여져 강물을 줄이겠다는 애끓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강물은 평균 수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이별의 안타까움은 참을 수 없는 애절함으로 사무친다. 그러나 그 안타까운 애절함이 아픔의 가시를 뽑아 내고 다시 해후를 기약한다. 인생은 결국 시간의 집적이라고 생각할 때 그 도상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헤어지는 슬픔의 애환을 가지게 된다. 이별 때문에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가슴속에 숨어있는 보석이라고 한 생텍쥐페리의 말이 그립다.
서양의 이별에는 신이 잠재해 있는 것 같다. 영국의 “굿바이”는 헤어지더라도 신이 함께 하기를 원한다. “아듀”의 프랑스 이별은 신이 곁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희망적 의미가 있다. 우리의 이별 “안녕히 가세요”는 그 빛깔이 담담하다. 그 말속에 이별은 번개처럼 지나 간 섬광같이 우여곡절의 빛깔을 지녔다.
만남과 이별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고 중지시킬 수도 없다. 나의 과거의 시간과 이별들은 어디로 가지 않고 내 마음속에 영원히 머물어 있다.
고국에서의 3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난다. 영겹의 세월에 강물이 불어나고 줄어들듯이 모든 것은 순리에 어긋남이 없다. 이제 내일이면 아쉬운 이별을 하여야 한다. 어제의 길 그 어쩔 수 없는 길을 떠나 보내고 나서 태평양을 건너 타국에 다 달으면 내 집으로 향하는 길이 아슬히 보일는지.

안주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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