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달개비 죽

2006-07-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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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는 남 캘리포니아에서 특히 사랑을 받는 꽃으로 사계절 내내 집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다. 우리 집도 드라이브웨이 왼편의 잔디밭과 옆집 사이에 경계를 짓고 있는 좁고 기다란 화단에 몇 그루의 나무장미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어져 있다. 그 장미나무 사이마다 칼라를 심어놓았는데 어느 한 사이에는 엉뚱하게도 달개비란 놈이 대신 자리잡고 있다.
그 곳에서 처음 달개비를 본 것은 2년 전쯤으로 화단을 정리하면서 잡초들을 뽑아내고 있을 때였다. 옆집 화단에서 우리 집 쪽으로 삐어져 나온 웬 낯선 풀이 있어 그냥 뽑아버리려다가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어 곧 멈추고 쳐다보니 바로 달개비였다.
6.25동란 이후 한국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달개비가 어떻게 이곳에서 자라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순간 까마득 잊고 있었던 옛일이 생각나며 동시에 외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그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달개비를 다칠 새라 손질한 후 잘 자라도록 남겨두었다. 꽃도 작고 잎도 볼품없는 일개 잡초에 지나지 않는 달개비가 장미와 칼라와 더불어 각별한 보살핌속에 우리 화단 한 곳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한달 가량 지나자 졸지에 비축할 겨를이 없었던 우리 집은 식량난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악질 부르주아라는 죄목으로 일찌감치 잡혀가셨고 형과 나는 10대 초반이었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끌려가는 의용군의 징발 위험성 때문에, 어머니는 아직 젊은 나이라는 이유로 바깥출입을 삼가고 계셔서 자연 식량 구입이나 부역 같은 동원은 주로 외할머니께서 도맡아하셨다.
처음에는 옷가지와 귀금속을 챙겨 뚝섬까지 가셔서 배로 한강을 건너 시골마을에 다니시며 곡식이나 채소와 맞바꿔 오셨지만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면서 그것마저 어려워져 배를 곯는 횟수가 점차 늘어갔다. 하루에 한 끼가 고작이었는데 그것도 물을 가득 채운 솥에 쌀 한 홉 정도 넣고 끓인 쌀죽 국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날이 지나면서 식구들의 얼굴은 누렇게 뜨고 눈은 오랜 환자처럼 깊숙이 파여 요즈음 뉴스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난민이나 중국으로 탈출하는 북한 사람들과 흡사한 몰골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머니는 형과 나를 부르시더니 산에 가서 달개비를 뜯어오라고 말씀하셨다. 습기가 있는 그늘진 곳에서 찾아보되 잎사귀는 어떻게 생겼으며 줄기에는 마디가 나있으나 매우 여려서 잘 끊어지니 막 다루지 말도록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남산 산자락인 남산동에 살았던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달개비를 뜯어왔고 할머니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 죽을 만드는데 넣고 끓이셨다. 멀건 쌀죽 국물만 마시다가 달개비가 들어있는 걸쭉한 죽은 맛도 괜찮았고 주린 배를 훨씬 더 채울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달개비를 뜯어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그 일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에 입성하기 며칠전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가족은 아직도 김일성을 형을 살려준 장군님으로 여기고 있다. 온갖 좋은 음식과 약을 마다해서 날로 깊어가던 형의 폐결핵이 그가 동족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으로 달개비 죽도 없어 못 먹는 껄떡이가 되자 어느새 감쪽같이 달아나 버린 것이다.
이웃에 살던 이응로 화백이 반미 포스터를 그리고 있다느니, 그의 부인이 전처소생 아들을 의용군에 입대시켜 사지로 몰아넣었다느니, 아무런 군장 표시도 없는 인민군 복장으로 나다니던 최은희 여배우가 카메라맨이던 남편 김학성씨가 남쪽으로 가면서 홀로 남은 전부인의 아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느니, 서울에 온 장군님을 만났다느니, 하는 그 당시 동네 사람들 사이에 무성했던 소문들은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그 보다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대를 이어 인민들을 굶주리게 하는 지도자 동지와 그런 위인이 좋다는 남한의 철부지들 그리고 미사일 개발비를 대주는 있는 한국의 위정자들에게 달개비 죽 한 그릇을 맛보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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