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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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나비

2006-07-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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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들

박완서 지음


불혹의 나이, 마흔에 등단하여 일흔의 중반으로 접어든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이다.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국내 유명 문학상 수상작 다섯 편을 모은 이 선집은 등단 이후 주로 중산층의 속물성과 한국사회의 물신주의, 가부장제와 여성문제, 전쟁과 분단의 상처 등을 다각도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해온 작가의 작품 중, 여성을 화자로 삼은 작품들이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 특유의 입담과 수다에 어김없이 빠져들게 되는데, 필요하다면 욕이나 비속어 등 허위의식을 단번에 벗겨내는 적나라한 언어, 인물의 내면을 속 시원히 내보이는 활달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물 흐르듯 잘 읽힌다.
이 책도 소설과 일상적 삶이 구분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가운데 핵심을 파고들어 직설적으로 세태를 비판하고, 때로는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거나 삶에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낸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과 ‘꿈꾸는 인큐베이터’는 ‘태아살해’를 경험한 여성의 복수극으로 강간과 낙태의 기억에 평생을 짓눌린 여성의 비극적인 삶과 아들에 대한 병적 열망의 도구적 여성의 모습에서, 주체적 여성으로의 변모를 묘사한다.
‘엄마의 말뚝 2’는 육친인 엄마와 내가 함께 겪어야 했던 전쟁 체험과 ‘분단’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을 기술하고 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1980년대 독재 정권기에 아들을 잃은 가련하고도 장한 어머니로 묘사된 ‘나’는 지금 여기의 인간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은하계 주문’을 외우면서 아들의 부재를 견뎌낸다. 현대 역사의 비극 속에서 생떼 같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홀어머니의 상처를 다룬다. ‘환각의 나비’는 젊어 남편을 잃고 세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홀어머니의 내밀한 아픔을 그린다.
각 소설은 해당 인물의 반생 혹은 평생에 걸친 시간을 통과해 마침내 상처의 뿌리에 도달하는데, 상처가 드러나고 치유되는 과정, 즉 초연하면서도 가파르게 삶의 격랑을 헤치고 종국에는 우리의 삶이 고통 속에서 행복을 경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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