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 독립의 의미

2006-07-0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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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뉴엘 루츠의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을 그린 것 중 대표작이다. 독립군이 탄 조각배들이 얼음으로 덮인 델라웨어 강을 건너고 있다. 워싱턴이 탄 배에는 13명이 갖가지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여성과 흑인도 있다. 이들이 독립 전쟁을 일으킨 13개 주를 상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폭풍에 맞서 우뚝 선 워싱턴이 있다. 손에는 지도자의 혜안을 상징하는 망원경을 들고 허리에는 권위의 상징인 칼을 차고 있다.
1776년 12월 크리스마스 워싱턴이 이끄는 독립군은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해 7월 4일 13개 주 대표들은 웅장한 언어로 미국 독립을 선언했으나 그 후 미국 독립군은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군과 역시 유럽에서 알아주는 강병인 독일 헤세 용병의 연합 공격으로 궤멸 직전이었다. 워싱턴은 뉴욕 전투에서의 연전연패로 병력의 90%를 잃었다. 빠른 시일 내 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미국 독립은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지고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질 판이었다.
이 때 워싱턴이 내린 용단이 겨울 폭풍을 뚫고 델라웨어 강을 건너 헤세 용병이 주둔하고 있는 뉴저지의 트렌튼을 공격한 것이다. 악천후로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그 결과 척후병에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강을 건너 기습할 수 있었다. 2,400명의 독립군은 대승을 거뒀고 1주일 후 다시 인근 프린스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독립군이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내외에 과시했다. 그 후 미 독립군은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5년간의 전투 끝에 1781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미 합중국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당시 영국이 ‘식민지 반군’에 지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구로 만도 300만대 800만으로 압도적인 영국의 우세였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주민 가운데서 독립을 적극 지지한 사람은 전체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주요 군 수송로인 바다는 영국 해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주민의 1/3은 적극적인 왕당파였다. 이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은 ‘신의 뜻’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미국 혁명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손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국가와 국왕에 충성하기 위해 태어난 계급 사회의 ‘신민’이 아니라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 등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이런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창설되었고 국가 권력은 국민의 동의가 있을 때만 정당성을 얻는다. 따라서 국가가 이런 목적을 파기할 때 그런 국가를 뒤집어엎는 것은 국민의 권리일뿐 아니라 의무다. 봉건 군주제나 절대 왕정이 지배적이던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상주의자였지만 인간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이해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미국 혁명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토피아를 이루려 했다 공포 정치와 나폴레옹 독재, 유럽 대전의 참화로 끝난 프랑스 혁명과 대조된다.
건국 후 20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미국의 건국 이념은 인류의 보편 타당한 이념이 됐다.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은 미 건국이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불완전한 혁명이며 건국의 아버지들은 위선자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모든 역사의 전진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보지 못하고 결점만을 지적하는 것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못 다 한 일을 완수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독립 기념일 아침에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북풍 한설과 싸우며 델라웨어 강을 건넌 워싱턴과 그의 장병들을 생각해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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