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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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갈며

2006-07-0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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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에다 다섯 고랑의 작은 밭을 일구어 놓고 해마다 채소를 가꾼지 다섯 해가 되었다. 그동안에는 밭 가장자리를 노루들의 침입 방어용으로 대여섯 피트 정도로 울타리를 쳐 놓았으나 울타리를 뛰어 넘고 들어오는 노루들에게 길러놓은 채소를 번번이 다 약탈당하고 말았다. 올해에는 섭섭한 내 마음속의 길이 만큼 울타리를 높게 쳤다. 10 피트도 넘게 높게 쳐놓고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다. 기분이 좋다.
채소를 심어놓고 싹이 나오기 시작하면 장갑 끼고 호미 든 채 채소밭 왕래하는 재미가 튀긴 옥수수 들고 극장가는 재미보다 더 좋다. 살림살이가 가난해도 농부들이 힘든 농사일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농사를 지어서 벌어들이는 적은 돈보다도 관념으로 쏟아지는 해맑은 햇빛과 자비를 슬쩍 감추고 양분으로 키워주는 흙과 몸으로 말하면서 자라는 어린 자식과 같은 농작물 때문일 것이다. 작은 잎새 위에 뛰어 노는 맑은 햇살들. 그 햇살은 끊이지 않고 퍼다주는 관념이었다. 돈도 받지 않고 퍼다주는 저 관념의 햇살들, 아이디어는 돈이 되기도 하지만 관념은 햇빛과 같이 모두 공짜다. 그러나 땅속의 보석이 공짜로 숨어있듯이 관념 속에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값진 일이 수천 수만의 다른 길을 가리키며 감추어져 있다.
건축가의 관념 속에는 수천 가지 다른 형태의 건축물 형상이 있고, 요리사의 관념 속에는 수 백 가지의 다른 맛과 다른 모양의 음식이 감추어져 있다. 화가의 관념 속에는 미학의 구체성이 숨겨있고, 음악가의 관념 속에는 선율이, 문학가의 관념 속에는 인간의 형상이 꿈틀대면서 숨어
있다. 관념은 생산의 씨앗인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관념이고 관념의 구체화가 실체가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 관념은 마음과 정신에서 비롯된다. 쉽게 말해서 ‘마음먹기에 달렸다’ ‘생각 나름이다’ 하는 말은 곧 실천하기 전의 관념이다.
여건이 어려운 사람일수록 궁리가 많고, 마음이 가난한 자일수록 그리운 것이 많다. 흔히들 “남자는 머리로 살고, 여자는 가슴으로 산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남자는 인성(人性)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고, 여자는 신성(神性)으로 가정을 보호한다.
해도해도 어려운 사회생활, 산 넘고 물 건너도 또 철철이 가로막는 어려움을 계산된 정신으로 계획하고, 가다듬은 정신으로 궁리해서 또 넘어야 한다는 남자의 투지가 그의 가정을 서게 하고, 삭막한 환경으로 휩싸인 세상을 마음으로 사는 여자는 밭을 가는 마음으로 살아야 그 가정을 보호하게 된다.
심었다고 해서 다 잘 자라지 않는다. 가꾸면 잘 자라고 내버려두면 그 밭은 황폐해 진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은 남자의 정신이요,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온돌방은 여자의 따스한 마음이다. 날이 서지 않은 남자의 정신은 남자이기를 포기하는 일이요, 따스하지 않은 여자의 마음은 여자이기를 버리는 행위다.
이런 것은 비록 관념이지만 현악기 연주자의 손끝이 발바닥처럼 굳지 않으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고, 무용수의 발끝이 말발굽처럼 굳지 않으면 아름다운 율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관념이 인위적인 많은 노력으로 구체화 할 때 남자는 기사와 같은 남자가 되고 여자는 농부와 같은 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민의 생활은 쉽지가 않아서 젊은 여자도, 나이 든 여자도 짜증 섞인 목소리를 감추고 아이들을 재촉해서 학교에 보내고는 서둘러서 일터로 나간다. 고아가 무엇이고, 홀아비 과부가 무엇인가?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거나 배려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고아이고 홀아비이고 과부이지 않은가? 어려우면 공상이 많아지고 외로우면 상상이 많아진다. 관념의 발동이다. 그런 관념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천하면 밭에 뿌려놓은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관념은 햇빛과 같아서 헛된 것이 아니다. 관념은 씨앗이 되고 씨앗을 키우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하라!

김윤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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