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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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에 필요한 친구

2006-07-0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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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 친지가 말한 경험담이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심한 부부싸움 끝에 홧김에 집을 뛰쳐나왔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녔다. 누구에게 속 시원히 하소연도 하고 싶었고 어떤 위로도 받고 싶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바쁜 사람들이고 또 속내를 털어놓을만한 가까운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길거리를 헤매는 고아의 신세였다고 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은 처지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이렇게 외로운 신세들이다. 어릴 때 함께 자랐던 죽마고우들이 대부분 한국에 남아있고 미국생활에서 사귄 사람들과 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사이는 그리 많지 않다. 또 미국생활이라는 것이 한국에서 보다도 더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남을 무조건 받아주기가 그리 쉽지 않다.
며칠전 발표된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경우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2명인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20년 전만 해도 3명이었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줄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인의 25%는 전혀 친구가 없다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친구를 잃어가고 있고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친구의 우정을 이야기 할 때 항상 인용되는 것이 ‘관포지교’이다. 한나라 때 사마천이 쓴 사기의 ‘관안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중국 제나라의 관중과 포숙은 어릴 때부터 친한 죽마고우였다. 함께 장사를 할 때 가난한 관중이 돈을 조금 냈는데 이익을 똑같이 나눴고 관중이 전쟁에서 도망쳤을 때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고 포숙이 변호했다. 관중은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이다”고 했다.
지금은 이런 고사가 무색한 의리 없는 시대가 되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도 없지만 믿는 마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간 나중에 화근이 되어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허다해졌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게 된다. 직업, 단체, 교회, 운동, 취미활동 등을 통해서 취향이 같거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통해 사귀게 되는 친구는 순수한 친구가 아니라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사귐이다. 골프를 치고 술자리를 같이하는 것도 친교 뿐 아니라 어떤 목적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친구든 저런 친구든 그래도 젊었을 때는 친구가 많기 마련이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사회활동을 중단하는 노년이 되어 은퇴를 하게 되면 그런 활동과 일로 인해 맺어졌던 관계가 없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그 힘을 잃게 되면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노인이 되면 힘을 잃게 되므로 주위에서 사람이 떠나게 되고 외로운 신세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젊었을 때는 친구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 혼자서 자신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자신만만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정신적이나 육체적, 또 경제적으로 힘이 모자라고 따라서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일도 많아진다. 그런 노년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떠나가고 친구가 없게 된다. 그래서 노인들은 외로워진다.
요즘 한인타운인 플러싱에서는 노인들이 삼삼오오로 모여서 함께 커피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된다. 주로 경로회관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그곳에서 취미활동을 하는 노인들도 있고 또 플러싱에 모여 이렇게 오후를 소일하는 노인들도 있다. 젊어서는 이해관계와 경쟁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경계해야 하겠지만 노후에는 서로 언성 높일 일도 없으니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때가 아닐까. 이런 기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노년의 우정을 꽃피우기를 기대해 본다.

이기영
뉴욕 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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