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묵을수록 좋은 것이 어찌 우정뿐이랴

2006-06-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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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숙성된 와인 색-향-맛 업그레이드
레드?호박색, 화이트?황금색으로 변신
부드럽고 섬세한 ‘세월의 맛’ 느낄 수 있어

최근 오래된 레드 와인을 맛볼 기회가 몇차례 있었다.
61년 부르고뉴산 모렝 생 드니(Maire & Fils Moren Saint Denis), 67년 보르도산 샤토 라피트 로쉴드(Lafite Rothschild), 79년 샤토 라투르(Latour), 82년 샤토 피숑 롱그빌(Pichon Longueville), 87년 나파산 레이몬드(Raymond), 93년 이태리산 반피 포지오 알로로(Castello Banfi Brunello Di Montalcino Poggio All’oro), 96년 나파산 메리베일(Merryvale), 97년 이탈리아산 카사노바 디 네리(Casanova di Neri Brunello di Montalcino) 등.
10년, 20년을 지나 수십년 묵은 와인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맛과 여운을 갖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영근 포도알의 탄탄한 맛과 향이 발효를 거쳐 오크통에서 익은 다음 병속에 갇힌 채로 수십년의 세월을 견디고 나오면 그 기나긴 삶과 인고의 맛에 경의를 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묵은 와인의 매력에 한번 빠지고 나면 숙성이 덜 된 와인에 대해서는 여간해서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불행히도 미국에서는 오래된 와인을 맛볼 기회가 거의 없다. 와이너리의 역사 자체가 짧은데다가 미국인들이 대중적으로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불과 몇 년 되지 않아서 그 전에 만든 와인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10년 이상 된 와인은 시중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찾을 수 있다해도 너무 비싸거나 아니면 잘못 보관하여 변질된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 마켓에 나와있는 레드 와인은 2003년에서 2004년산이 가장 많다. 2002년도 적지 않고 드물게 2001년산 와인도 찾아볼 수 있지만 2000년 이전의 와인들은 와이너리에 직접 주문해야 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5년이상 숙성한 와인의 맛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카버네 소비뇽을 주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은 적어도 10년은 숙성해야 제 맛을 낸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와인은 시간이 지나며 숙성할수록 향도 색도 맛도 다 변한다. 향은 훨씬 복합적인 부케를 갖게 되고, 색은 레드 와인의 경우 점점 더 옅어져서 나중에는 거의 연한 호박색(amber)으로 변한다. 반대로 화이트 와인은 점점 더 색이 짙어져서 진한 황금빛을 띠게 된다.
가장 중요한 맛은 부드럽고 섬세하게 변해간다. 젊은 와인이 아이처럼 발랄하고 활기 차다면 숙성한 와인은 점잖고 사려 깊다. 어린 와인의 거친 맛이 순화되어 조용해진 맛, 여러 맛을 가졌으나 하나로 둥그렇게 조화된 맛이다.
한국음식의 장이나 김치가 오래 묵으면 맛이 깊어지면서 코롬코롬해지듯이 와인도 나이 들면 낡은 서가에서 맡을 수 있는 큼큼한 냄새와 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숙성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맛은 더욱 더 잔잔하고 깊어지면서 세월의 무게와 함께 많은 맛들을 겹겹이 감추게 된다.
너무 나이가 들면 때로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에 젊은 와인의 강렬한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속에 숨겨진 맛을 하나씩 찾아내어 인조이 하기 힘들 수도 있다.
지난 주 와인애호가인 친지의 초대로 몇사람이 모여 보르도 그랑 크루 중에서도 최상급인 라피트 로쉴드 67년산과 라투르 79년산을 맛보았다. 나는 미리 전화로 눕혀서 보관해온 그 와인을 이틀 전쯤부터 세워두라고 부탁하였다. 태닌 침전물을 아래로 가라앉히기 위해서다.
병을 보니 와인의 양이 꽤 줄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증발된 ‘천사의 몫’(angel’s share)이 한 모금 정도는 되어보였다.
코르크를 여는 영광을 사람들은 나에게 주었다. 오래된 코르크를 잘 여는 것으로 인정받아온 나였지만 조심에 조심을 기하였어도 두 병 다 코르크가 너무 삭아있어서 부서지고 말았다.
디캔팅 할까 생각하다가 우리는 그냥 마시기로 했다. 오랜 세월 견디며 유지해온 맛이 혹시라도 너무 갑작스런 공기접촉으로 화들짝 놀라서 제 맛을 잃어버릴까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레드 와인은 오래 숙성할수록 색깔이 옅어진다.


색깔을 보니 67년산 라피트 로쉴드의 경우 너무 옅어져서 피노 누아보다도 더 연하고 투명한 색이 되어 있었다. 그 색깔을 보는 순간 혹시 식초가 되어있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라피트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원래 ‘귀족적인 와인’으로 칭송 받아온 라피트 로쉴드는 우아함과 섬세함을 잃지 않은 잔잔한 맛으로 우리를 감격시켰다.
79년산 라투르는 아직도 명랑하고 강건하여서 놀라웠다. ‘브루조아 적인 와인’의 명성을 지닌 라투르는 27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많은 과일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테이스팅을 해보면 프랑스 사람들은 왜 집집마다 셀라를 만들어놓고 와인을 묵혀서 마시는지, 와인 애호가들은 왜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오래된 와인을 사서 수집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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