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

2006-06-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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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송 USC 부부총장

자녀 교육과 양육에서 전통적인 어머니 역할이 중시되고 있지만 근래에는 아버지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대학 연구조사 결과들이 소개되고 있다. 2년전 86세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5녀1남의 자녀교육과 양육 또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의 삶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쏟아 부으셨다. 무척 엄하셨고 큰소리로 야단도 많이 치셨지만 자녀 교육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고 뒷받침해 준 아버지 덕분에 우리들은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진 6.25 전쟁 때 이북의 전 재산을 다 포기한 채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오신 후 사업에 몰두, 가족들에게 항상 경제적 풍요함을 제공하셨다. 꽤 큰 사업을 하시면서 잦은 지방출장과 수면부족에 시달리셨지만 여름이면 늘 대가족을 이끌고 그 당시 흔하지 않던 바캉스를 대천, 만리포, 해운대 등으로 다녀오시곤 했다.
아버지는 자녀 한명 한명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자녀 자랑을 많이 하기로도 유명하셨다. 우리들의 ‘특기’를 아주 자랑스러워 하셔서, 다섯번째이며 막내딸인 나와 송씨 집안의 외동아들인 남동생은 우리 형제들을 대표로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장기’를 선보여야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생과 나는 손님이 오면 응접실에 특별히 초대되어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손님 앞 장기자랑은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온갖 노래가 다 동원되었다. 내가 ‘라노비아’를 부르고 동생은 조영남의 ‘딜라이라’를 부른 것이 우리의 마지막 레퍼터리였다. 손님은 아버지 친구들만이 아니었다. 언니들과 선보러 온 예비 신랑감들까지 나와 동생의 노래를 들었어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의 자랑 레퍼터리가 바뀌었다. 언니들을 미국 가는 신랑들에게 다 시집보내자 이화여대에 들어간 막내딸이 송씨 딸들의 대표가 되었다. 대학 서예반에 들어가 동아리 그룹전에 출품했던 초급실력 거북 “구”자와 “근위보” 붓글씨가 집에 있던 유명한 서예작품들은 다 제치고 응접실 벽을 차지한 채 손님들께 첫번째 감상거리로 ‘강제’ 제공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칭찬에 기가 등등해진 내가 미대 친구에게 배우기 시작한 동양화 역시 근사하게 표구되어 집에 걸리기 시작하였다.
적극적인 아버지의 후원은 미국에서도 계속되었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의 최고 자랑은 97년부터 2년간 한국일보 여성 칼럼에 쓴 나의 글이었다. 내 글의 최고 팬이었던 아버지는 내 글의 마케팅에도 열성이었다. 글이 나올 때마다 수십장씩 카피를 해서 세인트루이스 한인사회에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주셨다. 언젠가 내가 세인트루이스를 방문했을 때 화교가 경영하는 아버지 단골 중국 음식점에 갔더니 주인 사모님이 내 글을 잘 읽었다고 하며 여자 조카한테 ‘삼국지’ 읽기를 권한다는 칼럼을 세인트루이스 화교모임에 카피를 해서 돌렸다고 했다. “한국 여자도 우리 중국 고전을 읽고 소개하는데 우리도 읽고 자녀들한테도 ‘삼국지’를 읽어야 된다”고 일장연설을 했다는 것이다.
자녀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기대감과 신뢰다. 야단보다는 ‘Positive Reinforcement’(긍정적인 자극=칭찬) 이다.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교육이론을 따로 배우셨을 리 없다. 그러나 항상 우리의 능력을 믿고 높은 기대감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진정한 교육가이셨고 자식들의 팬이셨다. 아버지날을 맞으며 이제는 내 곁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께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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