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치매 노인들의 미술 관람

2006-06-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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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요일 현대 미술관(MOMA) 5층에서 88세의 한 노인이 피카소의 명작 ‘거울 앞에 서있는 소녀’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을 짓는 이유가 현대 미술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이용해서 이 화가는 무슨 곡절을 이야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그 뜻을 알지만 우리는 모르지요” 부동산 브로커였던 이 노인은 지금 치매를 앓고 있는 분이다.
역시 같은 피카소 그림을 들여다보던 치매 할머니가 찬찬히 말을 꺼냈다. 거울속에 비춰진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지 않지만 얼굴이 아주 아름답다고, 그런데 왜 울고 있느냐고-. “뭔지 일이 잘못되어 저렇게 슬퍼 보이나 봐요. 어느 남자가 저 소녀에게 지옥에 가라는 말을 했나 봅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이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고 하는데 피카소를 보는 순간 뭔지 머리 속에 오는 자극을 느꼈을 거라는 해석이다. 이상하게도 미술관을 둘러보고 있는 이 몇 분 노인들에게는 치매의 특징인 초조함과 혼란된 표정이 없었으며 툭하면 다투려 대드는 몸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그 분들의 불만은 녹아내리듯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림에 흡수되어 그 내용에 대해 계속 대화를 하고 싶어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책임자인 트란체스카 로젠버그의 말이다. 천천히 기억력을 망각해 가고 있는 치매 환자들에게 그 어떤 순간 옛 기억을 연결해 주자는 의도 하에 MOMA가 ‘Meet Me at MOMA’라는 프로그램을 창설했다.
일반인에게 문을 닫는 조용한 화요일을 이용, 치매기관의 예약을 받아 일 년에 몇 번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에만 현재 400만 명이상의 치매환자가 있지만 인구증가에 따라 환자의 숫자도 늘어갈 것이라 한다. 아직도 치료방법이 막막한 채 이들을 보살피는 기관에서는 점점 음악과 미술쪽으로 방향을 돌려 임시적 대책을 찾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치매 상태에 들어간 환자라도 그들의 뇌는 여전히 음악이나 미술의 부닥침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젊었을 때 음악가였으나 완전히 기억을 상실한 한 분 치매노인의 경우에도 음악의 두뇌는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우리가 활동력을 갖게 된다는 보고도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드 쿠닝이 치매 단계로 들어갔을 때 왜 더 많은 작품들을 창조했을까? 전혀 그림을 그려본 적이없는 어떤 이들은 왜 치매환자가 되면서 예술의 재질을 보여주는가?
이 방면의 권위자 올리버 사카 박사에 의하면 환자들이 이토록 말을 많이 하게 되는 현상은 눈에 보이는 그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지 감정을 흔들어 놓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 MOMA 프로그램에서 이들에게 보여주는 작품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고, 무슨 사연이 있는 듯 한 전형적 그림들 즉, 피카소, 마티스, 고흐, 루소, 와이엇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폴락 같은 추상화는 기억력을 연결시켜 주기에 너무 혼란해서 아직은 피하고 있다.
미국 내 몇몇 다른 미술관과 더불어 MOMA에서 시도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물론 특별 교육을 받은 직원들이 정성껏 안내를 맡고 있다. 프로그램 참가비는 무료지만 제한된 공간 때문에 예약이 필요하다.
치매 노인들 한번 방문 때, 한 사람의 미소만 보아도 이 프로그램의 보람을 느낀다는 책임자 프란체스카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조봉옥
뉴욕 MOMA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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