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날은 간다

2006-06-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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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 갈려거든 가거라아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 중략…

무정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보소,
인생이 모도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산 인생,
아차 한번 늙어지면 북망 산천의 흙이로다.
사후에 만반진수는 불여 생전 일배주만도 못하느니,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마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 중략…

나머지 벗님네와 서로 모여 앉아서
한 잔 더먹소, 그만 먹게 허면서,
그드렁 거리고 놀아 보세-”

안숙선의 가사 사철가는 구구절절이 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절창으로 부르며 조상들의 시혼을 들려준다. 마지막 비가 오는가 싶더니 선뜻 여름이 왔다. 마당에 피던 목련꽃, 북숭아꽃, 백합이 지고 토마토 꽃이 피더니 열매를 맺기 시작했고 6월의 장미들이 활짝 피었다. 이제 나무들은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받으며 비가 올 때까지 몇달을 견뎌야한다.
2006년 6월. 지나가는 버스에는 ‘미션 임파서블 III’의 탐 크루즈의 대형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멋있다. ‘다빈치 코드’의 주인공 연인들이 걸어가는 포스터 또한 버스와 함께 달린다. 중국타운에선 장동건이 주연한 ‘무극’의 포스터를 보았다. 선셋 블러바드의 아크라이트 극장에서 세 영화를 보았는데 탐 크루즈는 매력적인 홍콩 여배우와 그저 끝없이 달리고 ‘다빈치 코드’는 책으로 읽어서 그런지 서스펜스가 없다.
서구문명이 기독교 중심으로 이어왔다면 예수님에 대한 모든 담론과 상상이 당연할 진데 교황청에서 왜 그리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무극’은 만화 같은 상상력이 무궁무진해서 즐거웠다. 세 영화모두 시각적인 기쁨을 가득 준다.
LA 거리엔 보라 빛 자카란다 꽃이 만발했다. 나무아래 떨어진 보라꽃잎들이 아름답다. 아가씨들은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거나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요즘 유행인 레이스 윗도리를 입은 게 자주 눈에 띈다.
나는 기품이 있어 보이는 여인들이 몸매가 좀 드러나고 야한 옷을 입은 모습을 좋아하는데 그런 멋진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역시 도시의 꽃은 여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 중에 혜원 신윤복의 ‘기녀’<사진>가 있는데 200년 전에 그려진 여인이 마치 요즘 거리를 걷는 여인들처럼 현대적이고 신선하다. 걷는 모습이 가볍고 자유로우며 선정적이기까지 한데 짧은 저고리 앞섶엔 가슴이 보일듯 말듯하고 챙이 넓은 모자아래 귀밑머리가 보일듯 말듯하며 작고 도톰한 입술과 쌍꺼풀이 없는 두 눈이 보통 자연 미인이 아니다.
요즘 아가씨들이 꿈꾸는 가는 몸매에 허리는 잘록하고 치마는 들어올려져 하얀 속바지가 다 보이고 발끝을 살짝 들어올린 가벼운 발걸음엔 봄바람이 이는 듯하고 부채를 든 손목은 당당하기까지 하다.
봄날은 가고 여름은 오는데 신윤복이 그린 미인은 사뿐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디를 가는 것일까.
봄날이 지나가 버리듯이 모든 것이 사라져가고 변화해 간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도 또한 먼 곳을 향해 떠날 채비를 한다. 다시 LA에 돌아오면 벗들과 함께 사막에 가서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하룻밤 자야겠다. 여름이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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