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강산에서 만난 북한 관리

2006-06-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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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도 쉬어 간다는 한계령을 넘어서 동해관광 고속버스는 강원도 고성 민통선 부근의 남측 출입국 사무소에 나를 내려놓았다.
현대 아산 소속 버스에 올라 탄 우리는 안내원의 명령 같은 주의 사항을 들었다. “이제부터 우리 버스는 남북 4킬로 구간의 비무장 지대를 통과합니다. 그 누구도 이 구간에서 사진 찍는 행위, 손놀림 등 행동을 절대 금합니다. 위반하면 그 자리에서 하차 당해 조사를 받습니다.”
버스는 비무장 지대 안으로 진입하였다. 철조망 넘어 동해안의 푸른 파도가 은빛 모래사장에 흰 포말을 안기고 물러나고 다시 밀려온다. 휴전선 안 2킬로에 달하는 금강호수가 50여년의 전설을 호수면에 담근 채 어디에선가 날아온 새들의 낙원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이러한 감성에 젖어든 사이 버스는 벌써 북측 출입 사무소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입북 수속이 시작되었다. 완만하게 진행되던 수속이 내 차례에 와서 딱 멈추었다. 북측 관리가 미국 여권과 사진과 실물을 대조하더니 모자를 벗고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쓴 모자에는 USMC라는 로고와 미국기가 자수로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자 뒤에 섰던 열이 다른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열이 올랐다. 수속이 거의 끝날 무렵 흰 쪽지가 다시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의 여권과 디지털 카메라를 내어주고 들어가라고 하였다.
금강산에서의 다음날 코스는 오전에 만물상 오후에 구룡폭포, 그리고 삼지연 및 해금강 코스였다. 나는 만물상행을 따라 나섰다. 외화 벌이하는 북쪽 아가씨와 그 배경이 잘 어우러져 구도를 잡은 후 디지털 카메라로 곧장 사진을 찍었다. 아래위 검은 평상복에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단 안전부 차림의 요원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보자 “금강산 호텔 303호 이 선생 맞죠? 젊어서 무슨 일 하셨습니까? 미국에 몇 살 때 가셨습니까?” 질문공세를 펴다 조금 전 찍은 필름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해 왔다. 필름은 없고 메모리를 지우면 된다고 알려주면서 그들 앞에서 지워버렸다.
그날 저녁 나는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 위하여 호텔 12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창 넘어 펼쳐지는 파노라마와 같은 광경을 조망하고 있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신사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들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이중 한명은 나의 입북이 지체된 데 대하여 사과하고 자신을 김형직 대학혁명학원을 졸업한 김xx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그는 나에게 언제부터 미국에서 살아왔느냐고 반문한 뒤 부시 대통령이 왜 공화국 거래 은행들을 죄는지, 또 북에서 추방한 범죄인들을 미국에 불러다 대우를 해 주는지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남쪽에서 대학 다니는 시절 고학을 하면서 눈물 섞인 빵을 먹어본 고난의 시절이 있었다고 말을 건넨 뒤 내가 전공한 시장 경제 원리와 내 경험을 들려줬다. 나는 그에게 북한 인민들의 고난의 행군이 언제쯤 끝나겠느냐고 물었다. 이어 한국이 오늘날 세계 10대 부국이 된 것은 순전히 정치꾼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 어린 결과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나와의 대화가 점점 불리해 지는 것을 느꼈는지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그의 허세에서 바람이 빠지고 있었다. 금강산은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가 만나는 곳이었다.

이남용밴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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