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들의 결혼식

2006-06-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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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둘째 아들 사이먼이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신부는 베네수엘라에서 온 유학생이다. 양가 가족들이 없는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기에 가까운 친지들만이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신부의 부모가 베네수엘라에서 왔고, 그녀의 형제들과 몇명의 친구들이 플로리다에서 왔다. 우리집 쪽에서도 아내와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그리고 큰아들은 워싱턴에서, 친한 몇명의 친구들은 캘리포니아서 왔다.
아내와 나는 들뜬 마음으로 결혼식 날을 며칠 앞두고 뉴욕에 도착하였다. 신부의 부모도 결혼식 며칠 전에 도착하였다. 양가의 부모들이 서로를 알기 위하여 그리고 결혼준비를 돕기 위하여 며칠동안 함께 결혼식이 있을 농장에 투숙하였다. 아내와 신부 어머니는 음식을 준비하고 나와 아들은 농장의 연못에 만든 나무 플랫폼을 장식하며 결혼식을 준비하였다.
30여년 동안 사랑과 정성을 쏟아 키운 자녀들을 전혀 모르는 가정으로 결혼시킨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자란 환경이 다르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신부의 어머니는 영어를 조금하여 의사소통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전혀 영어를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통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자녀가 택한 배우자를 사랑하고 배우자를 키운 부모를 존경하게 되고,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금방 친하게 되었다.
아내는 신부의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베네수엘라의 어머니들이 한인 어머니와 똑같다고 몇번씩 코멘트 하였다. 딸 셋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날마다 보고 싶어하는 신부의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하였다. “나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 밤에 죽고 아침에 다시 살아서 일어난다”하며 자녀들을 곁에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아내는 신부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이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위를 믿고 딸을 맡기세요”하면서 위로하였다. 아내는 며느리가 좋은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을 무척 흡족해 하였다. 우리가 함께 며칠동안 지내지 않았다면 모를 일들을 많이 알게 되어 안심이 되었다. 신부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혼식 날 비가 오는 것으로 일기예보가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바깥에서 하는 결혼식과 결혼만찬을 걱정을 하였는데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결혼식이 연못 플랫폼에서 행하여졌다. 농장 집에서 시작하여 연못까지는 거의 100미터가 되어 결혼식 행렬이 걸어오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랑과 신랑 들러리가 플랫폼에 미리와서 결혼식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나도 플랫폼에 미리 와서 기다렸다. 신랑 어머니와 신부 어머니가 촛불을 켜들고 나란히 걸어와서 촛불을 점화하면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촛불은 양가의 가문을 상징하고 나중에 신랑신부가 함께 자신의 어머니의 촛불로 단일 촛대에 함께 점화할 것이다. 신부의 언니와 나의 큰아들이 한 쌍이 되어 결혼행진을 인도하였다. 신랑신부의 들러리들이 짝을 지어 걸어왔고 반지를 든 초동이 도착하고 신부를 위해 꽃을 뿌리는 소녀가 도착하자 신부와 아버지가 입장을 하였다.
공식적인 참여자들 이외에 엑스트라들이 결혼식에 끼여들었다. 연못서 유유하게 놀고 있던 거위들이 꽥꽥거리서 결혼식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사이먼의 강아지가 쫄랑쫄랑 걸어와서 신랑 옆에 섰다. 진지하고 딱딱할 수도 있는 결혼식이 엑스트라의 등장으로 미소를 짓게 하였다.
나는 아들의 결혼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뿌듯하였다. 32년전에 나의 결혼식을 회상하였다. 사이먼과 달리아가 그들의 결혼식 날을 가슴에 깊이 담아 두었다가 지금으로부터 32년 후에 회상하기를 바란다.

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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