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숫자 좋아하는 어른들

2006-05-27 (토)
크게 작게
오랜만에 5번 프리웨이를 탔다. 처음 미국에 와서 세리토스 쪽에 살면서 거의 매일 LA를 나오면서 5번을 타고 다니 며 그 힘들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
모처럼 5번 길을 가면서 어떤 향수 같은 것이 내 몸을 감싸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전광판-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던 그 전광판, 숫자가 가득히 적혀 있는 그 전광판.
앞에 $ 표시가 있는 것을 보면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알겠는데 어쩌자는 건지, 그 돈을 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필요하다는 것인지. 전광판을 볼 때마다 궁금하던 나에게 숫자에 대하여 한가지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생땍쥐베리의 ‘어린 왕자’의 말이 많이 생각이 났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라고 한 어린 왕자의 그 말이.
어린 왕자는 말하기를 아이들은 친구를 소개받을 때 “그 친구는 어떤 장난을 좋아하니? 그 아이는 우표수집을 하니?”라고 묻는데, 어른들은 “그 사람 나이가 몇이야? 월수입은 얼마지? 형제는 몇 명인데?”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멋진 집을 보았어”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그 집 정원에 나비와 새가 날아오니? 창가에는 제라늄이 피었니?”라고 묻는데 반해 어른들은 “몇 에이커야? 얼마 짜리 집이야?”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확한 말인가? 우리 어른들은 모든 것이 숫자로 통한다.
교회 성도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어느 교회에 다닌다고 말을 하면 첫 번째 묻는 말이 “그 교회는 성도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라든가 “교회 일년 예산은 얼마지요?”라는 것이다.
도대체가 숫자를 떠나서는 거의 대화가 되지를 않는다.
모든 어른들은 숫자로 이야기가 통한다.
생떽쥐베리의 그 어린 왕자를 읽고 난 후 나는 숫자를 좋아하는 그러한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어린아이 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리라고 굳게 마음먹고 노력하였건만,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나보다. 숫자를 좋아하는 그러한 ‘어른’이.
요즘은 숫자가 자꾸 내 머리에 들어온다. 그리고 숫자를 찾아다니는 나를 발견하곤 가끔 나 자신 놀라 아연실색 한다.
정말 어떤 멋진 집을 보면 “저 집은 얼마짜리 일까? 몇 년된 집일까?”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 집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나는 얼마나 있으면 그 집을 살 수 있을까? 내가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되면 저 집을 살 수가 있을까?”를 생각한다.
일자리를 알아볼 때도 그 일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내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가, 얼마나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해질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얼마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일인가가 우선 생각난다.
잠시라도 머리를 식히고 숫자를 떠나 어린아이 처럼 순수한 마음을 갖고 싶다.


이영숙 / L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