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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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용사

2006-05-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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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부임한 지리과 교수가 대학 내에서 북한 건국신화의 정치성이란 주제로 공개강의를 했다. 교수건 학생이건 한인이 거의 없어 빈 강의실을 기대하고 갔는데 뜻밖에도 200여석의 강의실이 거의 차 있었다. 게다가 반 이상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김일성이 스스로를 신격화한 북한 건국신화야 한인들에겐 새로울 것이 없지만,그 교수가 한때 북한 담당 정보부 요원이어서 혹 북한에 대한 흥미로운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별다른 내용이 없어 실망했다. 하지만 미국인들, 특히 노인들은 진지한 얼굴로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강의가 끝나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그들은 강의내용 보다 과거와 현재의 남, 북한 정세와 경제, 38선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질문 속에 묻어나는 한국에 대한 관심과 지식으로 미루어 종전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정황을 가까이서 지켜봐 왔던 것 같았다.
50여년이 흐른 지금 거동도 쉽지 않았을 텐데 참석했고 경청 후엔 기회를 놓칠세라 다투듯 질문을 던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전용사에 대해 가졌던 내 생각에 큰 잘못이 있음을 깨달았다.
한국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지원한 것이 아니라 차출되어 한국전에 배치되었고, 전장에선 살고 이기겠다는 본능으로 열심히 싸웠을 것이며, 그러다가 보람도 느끼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 생겼을 것이란 생각에 각별한 고마움을 못 느꼈던 것이다.
당시의 미국정부와 무례했던 소수 미군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전 참전용사 모임에 간 적이 있다. 한국전 당시 미군 전투기 조종사였던 딘 헤스 대령(당시 소령)의 생일을 맞아 그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축하하는 모임이었다. 당시 그가 소속했던 부대의 전우들 수십 명이 다시 만나는 감회 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그의 업적이 남달라 큰 감동을 받았던 자리였건만, 그동안 까맣게 잊었던 것은 그런 생각 이 저변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헤스 대령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남한의 1천여 명 전쟁고아를 제주도로 공수한 후 그들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고아원 지원금 마련을 위해 그 경험을 기록한 ‘Battle Hymn(戰頌歌)’을 1956년 미국에서 영문 출판하였다.
목사로서 교인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갈등을 겪다가 그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전투비행사로 전선에 자원한 후, 폭탄투하로 사람을 죽이면서 겪었던 개인적 갈등, 북한 치하에 놓이게 될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긴급공수, 그들을 위한 한국보육원을 설립하는 과정 등이 그려진 자서전이다. 같은 해에 록 허드슨이 주연이 되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웬만한 도시의 중앙도서관에서 쉽게 빌려 볼 수 있다.
그의 책은 40여년이 지난 2000년 6월에야 오하이오 데이튼에 거주하는 한인의사 이동은씨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자신의 업적을 재조명 받고 싶지 않고 출판으로 겪은 피곤함을 되풀이하기도 싫다는 헤스 대령을 설득해야 했고, 낮은 판매율을 예상한 한국출판사들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출판의 어려움도 겪었던 이씨의 끈질긴 노력 끝에 도서출판 감자에 의해 출판된 것이다.
그날, 헤스 대령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참석했던 우리 한인들에게 오히려 와줘서 고맙다며 무척 반겼다. 며칠 후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으로부터 한국사랑이 가득한 감사카드를 받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참전 동기와 종전 배경 그리고 개개인의 참전 동기가 어찌 됐든, 그들은 전장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우리의 목숨과 땅, 하늘을 지켜주었다. 그 후 줄곧 관심을 갖고 한국을 잊지 않고 있는 많은 그들에게 늦게나마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지금은 미국 어디에서도 그들을 만날 수 있지만, 앞으로는 연세가 높아지는 그들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51년도 한국 근무를 회상하면서 대전에 대해 자꾸 물어보는 우리 앞집 아저씨의 턱수염도 매해 더욱 더 하얘진다. 참전용사의 날이 되면 초컬릿이라도 선물하고 대전 소식도 자주 전해드려야 겠다.

김보경
북 켄터키 주립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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