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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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신호등

2006-04-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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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미국에 와서는 늘 조심하며 차분히 운전을 하였는데 요즘은 운전이 많이 험하고 거칠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운전을 거칠게 하여도 나는 빨간 신호등에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멈춘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그 때는 기다린다.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하고 주위를 살펴보기도 한다.
윌셔가처럼 분주한 곳에서 빨간 신호등 앞에 서면 주위를 돌아보며 어떤 건물이 있는가 살펴보고, 식당이 보이면 어떠한 음식을 파는 곳인가 유리창문에 쓰인 글을 읽어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흥미롭게 관찰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보는 것도 흥미롭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껴안고 남들 시선에 상관없이 키스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도 재미있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나 노인들이 목발이나 의족을 의지하여 힘들게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가 이미 끝이 났는데도 다 못 건너서 온 힘을 다하여 걷는 모습을 운전자들이 전혀 싫어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것도 아름답다.
그런가 하면 차들의 빵빵거리는 소리도 들어보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가끔은 어디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음악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다.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음악인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막연히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본의든 아니든 감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잠시의 쉼이 나를 힘있게 다음의 파란 신호등에서 차의 액셀레이터를 밟게 한다.
한가로운 시골길에서의 빨간 신호등은 더욱 나의 눈과 귀를 바쁘게 만든다. 주위에 서 있는 나무도 보고 멀리서 그림처럼 다가온 산들도 바라보고 푸르디푸른 하늘도 바라보며 깊은 심호흡을 한다. 그때에 들려오는 소리는 아름다운 새의 지저귐, 잔잔한 소슬바람의 부드러운 소리 낙엽이 뒹구는 소리 등 내가 좋아하는 자연의 소리이다.
계속 파란 신호등이면 나는 그러한 것들을 감상할 겨를이 전혀 없다. 오직 앞 만보고 달려간다. 나의 옆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잘 모른다. 앞차를 봐야하고, 뒤차도 신경을 써야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 차도 기웃거리며 봐야하는 나는 주위를 둘러 볼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빨간 신호등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추고 우리의 주위도 둘러보고, 생각도 하고 자신도 돌아보고 다른 사람도 보게 만든다.
빨간 신호등에 너무 급하게 움직이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사고로 인하여 몸이 망가질 수도 있고, 차가 망가져 물질상의 손해를 가져 올 수도 있다.
빨간 신호등일 때는 멈추어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도 가지고 쉬어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파란 신호등이 나올 때에 열심히 힘있게 달려야 한다. 이 원칙을 잘 지켜야 인생이 쉬운 법인데, 그 또한 쉽지가 않은 것이 우리 인간들인가 보다.
요즘 한인사회의 마음 아픈 사건들을 보면서 더욱 느껴지는 일이다. 살아가기 힘들고 마음 아픈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럴수록 조금 쉬어 가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많이 든다.
지치고 힘든 아빠들이 빨간 신호등이라는 생각이 들 때에 그냥 모든 것 팽개치고 차라리 좀 쉬었으면 어땠을까? 모든것 다 덮어놓고 좀 쉬었다가 파란 신호등에 다시 갔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이영숙/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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