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망명허가 받은 서재석씨 가족

2006-04-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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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허가 받은 서재석씨 가족

미국망명이 승인된 서재석씨가 아들 긍진이와 딸 윤미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승관 기자>

1997년 탈북한 뒤 10년 동안 웃음을 잊고 살아온 서재석씨(본보 28일자 A1면 참조)의 얼굴에 마침내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27일 LA이민법원에서 망명승인을 받은 서씨는 “미국 여권을 받게 돼 기쁘면서도 긴장도 되고 묘한 기분”이라고 첫 소감을 밝혔다.
한국국적 탈북자 중 미국정부로부터 망명을 허가 받은 사실이 확인된 첫 번째 탈북자인 서씨는 “이번 판례가 나 같은 형편의 많은 탈북자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1966년 함흥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북한군 장교로 복무하며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던 서씨. 그의 인생은 1996년 폭발사고로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어 군에서 해고되면서 변화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좌절 때문에 세살 난 아들 긍진이와 함께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지만, 막상 중국에 도착하니 막막함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단속의 눈길을 피해 발길 가는 대로 대륙을 가로질러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하노이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담당영사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대답했을 때는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안 나왔다. 그 길로 긍진이를 들쳐업고 대사관을 나와 캄보디아를 거쳐 라오스에 도착했다.
라오스에서는 교포사회와 대사관 서기관의 따뜻한 보살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3일간 돌봐준 대사관 관계자는 태국으로 가면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국경건너 교통편까지 마련해 줬다. 방콕에 도착한 서씨는 미국 행을 희망했지만 유엔고등판무관실(UNHCR)의 중재로 1998년8월30일 한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공기와 물도 안 좋은데다, 관계자들의 참견과 감시가 심해 제대로 된 생활이 어려웠다.
탈북자 여성을 만나 결혼도 하고 이쁜 딸도 낳았지만 서씨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북한의 그것보다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서씨는 “아들 긍진이가 학교에서 탈북자의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을 당하자 결국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2003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입국한 뒤 바로 망명을 신청했다.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의 삶도 녹록치는 않았지만, 정부의 간섭이 없어 좋았다.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주위에서 수많은 분들이 우리를 도와줘 좋은 결과가 있었다”는 서씨는 “인권프로젝트 변호사들은 물론이고, 한인건강정보센터 노재덕 선생님께 정말 감사한다”고 말했다.
어느새 초등학생이 된 아들 긍진이와 한국에서 태어난 딸 윤미(5), 아내와 함께 LA한인타운에 살고 있는 서씨는 “식량사정이 좋아졌다는 지금도 북한에서는 300만 명이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고 있다”며 “나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나 같은 탈북자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겪고 있을 고난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의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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