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재처럼 사라지며 눈처럼 순결한 것들

2006-04-2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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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렸던 그리고 잃어버린 낙원을 한참 동안 걷다가 나온 것 같다. 고요하게 마음을 열게 하는 동양적 정취의 음악이 흐르고, 사진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출연자들이 눈을 감고 있다. 새, 표범, 코끼리들이 끊임없이 아이들과 함께 나타나고 사라진다. 의식이 현대를 지나 고대의 강과 사막, 밀림으로 들어가 태초의 시간과 하나되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사진과 사진속 인간과 동물들이 마치 정글을 지나가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다.
드높은 천장과 기둥들은 미래형 절처럼 느껴지고 세 편의 영화가 동시에 상영되는데 대사 없이 침묵 속에서 모든 영상이 전개되며 흐른다. 현대에서 멀고 먼 다른 세계, 인간과 자연, 동물이 하나였던 태초의 낙원에의 향수. 인간 속 자연이 깨어나 하나되어 있는 평화로운 내적 의식의 세계.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기억하고 있는 그 고요한 조화의 세계에 다녀온 듯 하다.
예술가 그레고리 콜버트가 14년 동안 인도 케냐 등 30여 나라를 여행하며 창조하고 모색해온 사진과 영상이 샌타모니카의 피어 옆 파킹장에 세워진 이동박물관(Nomadic Museum) 가건물에서 5월14일까지 전시되고 있다. 건축의 구조 또한 볼만한데, 152개의 철 컨테이너를 쌓아올려 5만6,000 평방피트의 거대한 공간이 임시로 세워져, 전시장을 걷는 것이 마치 하나의 긴 시각·청각 공간의 여행을 하는 것처럼 시도되었다.
건축가는 일본의 시게루벤으로 새로운 자재 새로운 발상으로 현대건축의 개념을 바꾸어 왔는데 전시장의 구석구석에서 새로운 건축적 시도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바다가 보이고 곧 사라질 거대한 가공건물이 있고 아이들이 좋아 할 동물들의 사진이 차원 높은 명상적 의도로 전시되고 있어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관람하면 참 멋진 문화경험이 될 것 같다.
수많은 자동차의 행렬, 바쁜 일상, 컴퓨터와 가전기기로 가득 찬 복잡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이 깊은 태고적 선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를 일깨워주는 예술가의 예지와 노고가 느껴진다.
어느 정도는 의도적이고 감상적으로 느껴지기는 하나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극복해 누구든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감성의 차원에서 창조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관람하고 있나보다. ‘재와 눈’ (Ashes and Snow) 전시를 나오며 지난번 태국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날들이 기억났다. 60여 마리의 코끼리를 보호하고 있는 태국 랑팡의 드넓은 원시림에서 지낸 사흘간의 여정이었다.
코끼리 보호를 위해 예술가들이 모여 며칠을 묵으며 코끼리 그림을 그려 기증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나무로 지은 작은 숲 속의 캐빈에서 잠자고 청명한 새벽 숲 공기 속에 일어나 코끼리를 타고 코끼리에게 바나나, 대나무 잎 등 음식을 주고 목욕을 시키고 코끼리 그림을 그리는 나날이었다.
코끼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마후드라고 하는데 대대로 마후드를 하는 마후드들의 마을이 있다. 저 먼나라 태국의 바나나 원시림에서 코끼리와 함께 사는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손으로 만든 옛 악기의 연주와 이국적인 노래를 들으며 약초로 만든 술을 마시고 불을 피우고 밤늦도록 놀던 원시림 속의 날들이었다.
그곳은 예술가들과 코끼리 보호에 참여하는 봉사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예술가들은 며칠 지내며 코끼리에 관련된 그림을 그려두고 오면 되고, 봉사자들은 마후드를 도와 코끼리 보호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은 방콕 문화성이 전시하여 기금을 마련함과 동시에 사라져가는 코끼리를 보호하자는 각성과 국제적 협조를 목적으로 한다.
도시생활에 젖은 나의 마음이 원시적이고 소박한 삶의 경험과 함께 맑은 공기, 이국정취에 다 씻긴 꿈같은 여행이었다. 타일랜드 예술위원회(Thai Art Council)에 연락하면 누구나 랑팡의 코끼리 보호센터를 방문할 수 있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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