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모목사(뉴욕한국인그레잇넥교회 원로)
1944년 헝가리의 시겔이라는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소설가요 보스턴대학 교수인 엘리 비젤(Elie Wiesel)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치 수용소에서 각가지의 위험과 대학살의 고난 끝에 살아남아, 그 죄악상을 오늘의 세계에 증언한 노고로 노벨상을 받기도 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가 이십년이 지난 후 고향 시겔에 가보았다. 그러나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시겔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그토록 비참하던 유대인들의 사건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저들의 이웃으로 살던 유대인들이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슬프게 끌려가던 사실을 이토록 까마득하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시겔 주민들이 어제의 자신들의 이웃을 쫓아낸 데 대해서 아니면 그들을 부인한 데 대해서 내가 화가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가 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웃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빨리 완전하게 유대인들은 그 도시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도 쫓겨난 것입니다.”비젤의 이런 탄식은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비극을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가 죄를 짓는 그 자체보다 더 큰 죄가 된다는 것이다. 잊고 잊혀 진 곳에서는 아무런 치유나 구원의 길이 없고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은 더 큰 악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비젤이 아우슈비츠나 그 밖의 나치 수용소들을 우리에게 소개 증언하는 것은 우리에게 죄의식을 고취하거나 양심을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난 과거의 비극을 되새기면서 다가올 더 나쁜 재난을 막으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잊음으로 히로시마, 나가사끼의 원자탄 폭격을 가져왔고, 히로시마 나가사끼를 잊음으로 온 인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웬(Henry Nouwen)이 지적하듯 “우리의 과거를 잘라 버림으로써 우리의 미래는 함께 마비된다. 즉 우리 뒤에 있는 악을 잊어버리면서 우리 앞에 있는 악을 불러들인다.” 확실히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시인이요 철인이던 하버드의 산타야냐(George Santayana)의 말과 같이 “과거의 죄악을 되풀이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2천여 년 전 예수가 수난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운명하던 그 아픈 과거를 수난절을 맞아 다시 기억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아니하고 오늘과 내일이 더 밝은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 있다. 예수만이 아니라 나는 물론 온 세계
중생들은 오늘 아직도 각 가지의 수난 속에 살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을 우리의 고난과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비젤은 우리가 과거의 고난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에서 인간의 배신과 하나님의 고통을 잊지 않으며, 그 속에서 또한 내 자신의 배신을 본다. 동시에 하나님이 오늘의 나의 고통을 알고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와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새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