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아버지의 사랑

2006-03-11 (토)
크게 작게
어렸을 때 우리식구가 식당에 가면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자상하게 시켜주시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메뉴는 정작 보이지 않아 내가 의아해 아빠 것은요? 하고 물으면 아빠는 음, 됐어 라든가 어? 내 것은 안 시켰나? 하셨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가족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아버지의 삶은 가족을 위한 자기희생과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미국으로 건너와서도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오고 있지 않으시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태어나신 후 한 살되던 때, 할머니의 등에 업혀 남으로 내려 오셨다. 그리고 한국전의 참혹함, 추위와 공포 그리고 배고픔을 아직 어린 나이에 경험하셨다. 아버지는 오히려 이러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기를 보호해 주시던 조부모님의 사랑이, 가족이 얼마나 절실히 귀중한 것인가를 배웠나 보다.
아버지는 4형제의 첫째 아들로, 있어야 할 것보다 너무나도 없는 것이 많았던 성장기에 남으로 내려와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형제와 어린 동생이 자기가 감수하는 전부였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애정과 책임과 동정이 어린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2-3학년 시절 한국전의 폐허 위에서 공부할 때. 그림을 잘 그리신 아버지는 자기 동무들에게 만화 등을 그려주면 대신 엿, 콩 볶음 같은 것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면 친구들 앞에선 함께 먹는 척했지만 집에 혼자 남아 있는 동생을 생각하여 몰래 옷 속에 감추고 와 어린 동생에게 주곤 했다 한다.
그러면 동생은 형은 먹었어? 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언제나 거짓말, 응 나 먹었어라고 했다고 한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 속, 하교 길 어린 아버지에게도 허기가 있었을 텐데 동생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그 작은 캔디하나에 동생이 즐거워 할 거라는 생각에 아버지의 발걸음은 가벼웠노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15세 되던 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다음 해인 학교 산악반에 가입해 산에 다니기 시작 하셨다.
아버지를 여읜 어린 아버지의 마음속에 넉넉하신 아버지의 모습인양 산은 청년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클라이머로서, 또 그 클럽의 맏형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창립하여 마운틴 빌라라고 이름 한 산악 클럽은 또 다시 아버지의 사랑하는 집이 되어 갔다. 그런 아버지는 자기가 몸담고 있던 산악클럽에서 아버지 특유의 동료를 향한 희생과 사랑의 헌신이 있었나 보다. 왜냐하면 그 클럽은 작년에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세계에 흩어졌던 100여명의 아버지의 산악가족이 모여 한국 한라산에서 기념등반을 하는 등 홈커밍 데이를 크게 열고 아버지의 수고를 기념해 주었으니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 선거에 나선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크고 힘차게 달리는 호랑이를 그리신 후 그 위에 내가 올라타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경의의 시선을 보내는 멋진 모습의 포스터를 그려 주시고 내 딸아 너는 이렇게 이길 것이고 인생에서도 성공 할 거야! 하시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내가 당선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아버지의 기도와 격려 덕분으로 이기는 인생을 살아 갈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것, 자기를 희생하며 가족과 자식을 사랑하시는 모습이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며 나는 이러한 자랑스런 아버지를 보고 배우며 자라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김현주/ LA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