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도산 선생과의 만남

2006-03-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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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3월 10일이되면 도산 선생의 서거를 추모한다. 올해로 68주기가 된다. 이날이 되면 숙연한 마음으로 도산의 삶을 되돌아보고 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3월 29일에는 도산 가족의 고가(1937-1946)가 새롭게 단장돼 USC의 한국학연구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최근 이민 100주년을 전후하여 이곳 LA와 리버사이드에서는 미국정부와 미주 한인들, 한국 정부와 도산 기념 사업회의 협력으로 도산 선생 동상건립, 대한민국민회 복원, 도산 우체국 지정과 도산 인터체인지 명명, 굿사마리탄 병원내의 도산 홀 개관 등으로 LA는 도산 선생을 기념하는 성지로 변모되어 왔다. LA 총영사 집무실에도 도산의 전신사진 ‘귤 따는 망테’를 맨 전신사진이 걸려있고 미주 한인들의 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영광스러움과 함께 도산의 임종과 장례식에 대해 회상하고자 한다. 1938년 3월10일 경성 대학병원서 도산이 임종하실 때는 조카 한 분(김순원)만 있었고 밖에는 일본순사 한 명만 지켰다. 당시 한국인 의사들이 몇명 있었지만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수근거렸을 뿐이었다. 장례식은 정신여고 운동장에서 치른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때의 상황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에 신문기사를 통해 참석자가 20여명(혹자는 10명)이라는 기록이 전부였다. 2년전 도산의 장녀 안수산 여사와 저녁모임에서 도산의 유해를 망우리 묘소에서 도산 공원으로 이장할 때의 얘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는 윤병욱(현 한미재단 전미주 총회장, 홍사단 단우), 감향자(김여제 선생 따님) 선배 단우, 닥터 김(김향자 단우의 친구), 이원석군이 참석했다.
1973년 11월 9일 도산 선생 탄신일을 기해 한국정부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도산 공원을 조성하고 국무총리까지 참석한 가운데, 도산과 미국에서 모셔온 이혜련 여사를 국민장으로 합장하였다. 그 날은 세상이 통곡하듯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몹시 추웠다.
그 며칠 전 망우리 묘소에는 이장을 위한 절차가 있었다. 그때 필자는 대학생이었고 우리들의 습관대로 관속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물이 찼는지 나무뿌리가 파고들었는지 등을. 명당이라고 부를 정도로 관 내부는 깨끗했다.
유골은 화염속에서 타버린 듯 새까맣고 부분적으로 녹아버린 곳도 있었고 발뒤꿈치에는 시커먼 천 뭉치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순간 일제의 또 다른 만행을 깨닫게 되었다. 도산의 유해를 염도 없이 임종 시에 입고 계시던 병원복 차림으로 모포 한 장 덮어 들것으로 옮겨 석회석관 바깥에서 내동댕이치듯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시대의 상황이 얼마나 암울하였고 정복당한 국가이라 하지만 우리의 민족적 지도자를 이렇게 허망하게 처리하는 것을 보고 일제의 잔학상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읽을 수 있었다.


이창수
흥사단 미주
위원부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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