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과 말씀의 지혜

2006-03-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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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운동장에 흙먼지를 몰고 바람이 인다. 한떼의 아이들이 모여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고 키가 큰 포플러나무 잎새가 엷은 햇살을 안고 반짝이며 춤을 춘다.
“너는 영리하고 정이 많은 착한 소년이지. 어려움이 닥쳐도 열심히 노력하면 꼭 성공할 수 있단다. 선생님이 이렇게 약속하지.”
코스모스같이 가냘픈 선생님의 손이 따뜻했다. 나를 유난히 반겨주던 우리 반 여선생님은 내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나는 내일이면 먼 곳으로 전학을 간다.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신 선생님의 그 말씀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슬픈 그리움의 울림이 되어 가슴속에 남아 있다.
말속에는 사랑의 꽃을 피우는 신비로운 생명력과 아픔을 치유해주고 기쁨으로 이끌어 가는 거룩함이 있다. 그러나 자칫 헛발질로 상대에게 영원히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말속에는 비수가 있고 가시가 무성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옛말들은 말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말 한마디가 탈이 되어 참석자들이 긴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속을 끓였다. 격의 없는 사이일수록 신뢰와 믿음으로 정화된 말이 필요하다.
오늘날처럼 인정이 메마른 때일수록 정이 깊은 말이 그립다. 좋은 글에서는 참다운 말씀이 기상한다. 그 속에 담겨진 지혜로움을 씨앗으로 띄어 삶을 윤택하게 하는 촉매역할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
장미에 가시가 많다는 말보다는 가시가 많은 나무에서도 아름다운 장미가 핀다 하면 그 의미가 정겹다. 주전자에 물이 절반도 안 남았다 보다는 아직도 절반 가까이 남아있다는 말이 더 희망이 있어 보인다.
산에서 소리를 지르면 어김없이 답이 온다. 산울림처럼 어떤 말을 내보내느냐에 따라 다시 전해오는 것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말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어 진다.
말의 공해 시대에 살면서 말 같지도 않은 말들로 식상하곤 한다. 말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움직인다. 말이 진실하고 성실하게 정돈되었을 때에는 지대한 생명력을 지닌다.
말은 위대함을 부여해 주기도 하며 때로는 욕망을 재우기도 한다. 말의 위력은 대단하나 어떤 말이냐에 따라서 그 힘은 강하고 약할 수 있다. 지금도 그 옛날 학교 운동장 울타리에 울창하게 자란 포플러 숲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선생님은 떠나는 내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시었다. 햇살에 수많은 잎새가 일렁이며 하얗게 해맑은 웃음으로 하늘로 오른다.
“저것 좀 봐 나무도 말을 하네. 저 중에는 너의 말도 있단다. 말이 바르고 힘이 있어야 저렇듯 서로 몸을 부비며 하늘을 향해 나를 수 있단다”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쥐어 주셨다.


안주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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