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럭에 가득 채워진 눈

2006-03-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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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겨울은 유독 따뜻한 날씨를 보여주었다. 계속 이렇게 되다보면 계절을 영 잊을 것만 같은 조바심마저 들게 하였다. 2월 중순, 갑자기 뿌리기 시작한 비가 이틀을 오락가락하더니 드디어 윌슨 마운틴 곳곳에 흰 점들이 희끗희끗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10번 프리웨이 서쪽 안드레이 산맥 멀리 마운틴 발디 높은 꼭대기는 어느 틈에 하얀 모자를 뒤집어쓰고 으스대며 뽐내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도 아닌데 계절을 배반하고 겨울이 쉽게 떠나갈 수 있겠는가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서.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시 따뜻해지면 눈은 녹아버릴 것이 뻔한 사실이다. 예전처럼 친구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맞장구친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하는 산행은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다. 은은한 멜로디에 심신을 맡겨놓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여행담을 곁들이고 이런저런 가정 대소사를 듣는 사이 가슴 뭉클뭉클하도록 눈부신 은빛 세계가 눈앞에서 별천지를 펼쳐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눈들이 눈가루를 날리며 이쪽저쪽으로 불려 다닌다. 눈가루 알갱이들에 꽂히는 햇살이 찬란하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배겨낼 재간이 없다. 뺨을 치는 찬바람에 살갗이 얼얼해 와도 마치 배회하는 눈을 붙잡아주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두 손을 펼치고 받아주려 했지만 세상에 때묻은 손을 거절이라도 하는 양 그들은 더 멀리 높이 빠른 속도로 내 손을 거들떠보는 일조차 없이 획획 빠져나가고 있었다.
머쓱해져서 올렸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내 마음에 끼인 거적때기 같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 순수는 지금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시리게 가라앉은 젖은 내면을 덮어주기라도 하는 듯, 청솔 가지마다 꽃을 피워놓은 목화가 언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준다. 눈은 이처럼 시린 가슴을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스하게 품어주기도 하는걸 처음 알았다.
더 높이 오르면서 산 속은 많은 적설량을 가지고 있었다. 내려서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만 멈추고 말았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픽업트럭에 눈을 가득 담고 있었다. 젊은이는 빈 트럭을 꼭꼭 눌러가며 열심히 눈을 퍼담고 있었다. 호기심이 어려서 왜 그렇게 눈을 많이 퍼담느냐고 물었다.
그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에게 갖다 주려고 한다고 했다. 너무 추워서 어린애들을 데리고 올 수 없어서 자기가 눈을 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정말 멋진 아버지다. 모든 가정의 아버지들이 저 젊은이와 같은 정서를 가졌다면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아름다운 정서를 지닌 사람들로 산이 꽉 차서 백옥 같은 눈을 삽으로 뜨는 사랑의 물결로 가득 차면 우리가 사는 마을 마당도 순백색으로 덮이리라는 떨리는 마음이 솟구친다. 사람 사는 구석구석이 깨끗한 순수로 덮이면 누구도 함부로 남에게 잔혹한 일을 저지르거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을 감행하지 못할 것이다. 온순한 세상을 만드는 일은 사람사람 각 개인의 정갈한 품성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젊은 아이 아빠에게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빌어주는 나의 마음도 행복으로 가득 찼다.


문금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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