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 갠후 뜨는 무지개

2006-02-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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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미 대륙을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군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제 40회 2006년 북미 프로 미식축구 수퍼보울 경기에서 하인스 워드라는 눈부신 스타가 탄생했다. 동시에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하인즈 워드의 자라난 배경은 한인사회 언론의 집중 보도를 받았다.
열광적인 수퍼보울의 축제 무드속에서 나는 햇병아리 레지던트 수련 중 클리닉에서 만난 국제결혼으로 망가진 불우한 여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절망과 치욕, 처절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면도칼로 손목의 동맥을 끊어 죽음을 시도한 여인이다. 앰뷸런스로 응급실에 실려 온 후 그녀는 의식을 회복한 후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그녀의 힘겹게 살아온 길고 긴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지금은 그녀의 이름도 잊었지만 나의 기억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짧게 줄여서 다시 편집해 본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미국 남부 출신인 미국 병사를 서울에서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가 복무를 마친 후 본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도 짐짝처럼 미국으로 실려 왔다. 그녀의 결혼은 선택이라기보다는 강요된 생존의 수단이었다.
그녀가 낯선 미국생활을 시작한 곳은 모래바람이 부는 삭막한 사막이었다. 시집 식구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밖으로 밀어내었다. 그들은 그녀를 지구 밖에서 온 외계인처럼 낯설고 냉담하게 대했다. 물론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고국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은 더러운 오물이라도 바라보는 것 같이 그녀를 멸시했다. 그녀는 벼랑 끝까지 밀려 공포와 위기의식 속에서 살았다.
이런 처지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니 병원 수술비를 보내달라는 독촉, 오빠와 동생은 이민 보따리를 싸놓고 하루빨리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병든 부모에게 입원비를, 가난한 형제들에게는 생계비를 고국에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들 형제 자매는 한 가족씩 고국을 떠나 그녀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형제들과 조카들은 경제적인 여유와 생활의 기반이 잡힌 후에는 부끄러운 과거를 지닌 그녀와의 인연의 고리를 끊고 모른 척하였다.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굴욕은 성장한 세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한 정신적인 학대였다. 그들은 친구들이 집에 오면 그녀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하녀처럼 대하였다. 또한 술이 취한 남편은 여자들을 침실로 끌어들였고 폭행을 가하였다. 그녀의 절망은 자살 기도로 이어졌다. 그녀는 살아온 긴 이야기를 끝낸 후 손거울을 꺼내 헝클어진 머리를 빗으며 남편이 데리고 오는 여자들에서 풍기는 향수 냄새와 악취가 나는 침실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녀의 긴 이야기가 끝난 후 병실 창밖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그치면 눈부신 무지개가 뜨겠지요.”퇴원수속을 하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그녀에게 내가 마지막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다.
6.25 전쟁후 헐벗고 가난했던 시절, 미국병사와 결혼한 많은 여자들은 역경속에서 두 문화를 접목시키고 이민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아준 숨은 공로자들이다. 이민 초기의 개척자였던 타오르는 이민의 불꽃들이다. 그녀의 부모, 형제들이 집단으로 이민을 와서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삶을 이룩하고 있다. 그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했을까?

박민자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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