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니의 눈물

2006-02-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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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잘 알려지진 않은 것 같지만 19세기 독일의 시인 마틴 그라이프는 “장미꽃 피어나는 봄날에 쓸쓸하게 있기보다는 슬픔에 잠기는 게 더 나으리라”라고 읊었다. 온갖 만물이 깨어나고 꽃피는 봄철이 되어 누구나 한 두번쯤은 자신이 쓸쓸하다고 느끼겠지만 탄식만 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을 한번 돌아보고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생의 고락과 슬픔에 젖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LA 북동쪽에 있는 앤젤레스 하이웨이를 달려 윌슨 천문대 가는 산길을 운전하다 길가에 잠시 멈춰 정말 볼품없는 약 1~3피트 크기의 싸릿 나무 비슷한 꽃 하나를 보았다. 이름하여 장송화라 하는데 더 살펴보았더니 누렇게 죽은 어미나무 밑에 파란 새싹의 후손이 주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 말라죽은 장송화를 바라보면서 난 웬일인지 많은 새끼를 낳고 그들이 자라날 때까지 자신의 몸뚱이를 다 파 먹히게 해 결국 가시 뼈만 남는다는 어미 물고기 즉 가시고기를 생각했다.
어려서 난 봄나물 파릇 돋아나고 양지바른 곳에 아지랑이 솟는 시골 작은 초가집에 살았었다. 어머니 나이 38세 되던 때 아버지가 출장중 차 사고로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큰집을 팔고 오두막집으로 이사하셨다.
아마도 그 돈으로 조그만 행상을 하셔서 끼니걱정은 별로 안하고 산것 같다. 그 당시만 하여도 식량기근으로 굶는 집도 많았다.
학교 다닐 적 어쩌다 학업우수상을 받거나 내 작문이 교지에 실리면 어머닌 그걸 들고 다니시면서 동네방네 사람들에게 내 보이며 자랑을 하셨는데 그런 것 때문에 사는 보람을 느끼셨나 보다.
읍으로 가는 길이 얼어붙어 미끄럽거나 날씨가 풀려 진흙탕 길도 매일같이 걸어 행상 다니시면서도 가끔 나다니던 학교에 들리셨는데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어디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어린 마음에도 내 공부 잘하는 재미로 사시던 어머니가 불쌍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대학 다니러 서울에 올라올 때엔 수년간 입을 옷가지와 살림할 돈도 마련해 주시면서 헛간에 놓여있던 검정우산까지 챙겨주시고 “혹 옷이 젖어있으면 감기 들라, 서울은 겨울에 몹시 춥다던데 정 추우면 겨울내복을 꺼내 입어라. 모진 세상에 젖지 말고.... 서울같이 큰 데 가서 많이 배우고 큰마음 가지고 잘 지내거라.”
‘어머니는 강하다’란 말과 같이 6.25사변 후에도 땔감마저 없을 때 혹한에도 어머니는 산에 올라가셔 그 무거운 솔가지를 그뜩 머리에 이고 오셔 집 울안에 쌓아두셨고 과부 된지 몇 안 되어 업고 다니시던 갓난아기, 그러니까 나의 동생을 백일해로 그만 잃었는데 손수 땅파고 묻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시지 않으셨다.
돌아가시기 얼마전 내가 직장에서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하루는 날 불러 하시는 말이 집 식구 같던 개를 파셨다 했다. 연유인즉 사랑스런 손자에게 먹거리를 사줄 용돈을 마련키 위함이라 하셨다.
이튿날 그 팔아 넘긴 개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개를 쓰다듬으며 “날 용서해라, 용돈 없어 널 판 것이니”라고 개에게 말하며 도로 끌고 가려한즉 신기하게도 개는 순순히 끌려가며 눈물까지 쏟더라고 하셨다.
그때엔 그리 말하신 것 별로 믿지 않았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개도 제 최후를 알고 눈물 흘릴 수도 있으며 운명 앞에 순종할 줄 아는 영특한 동물이 아닌가 한다. 그보다는 정든 집 개를 몇 푼받고 팔아 넘긴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종진 재미시협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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