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테면 비범한 가객(歌客)이었다. 그는 웬만해서는 목청을 뽑지 않았다. 허나 제대로 한 판을 찾아 목청을 뽑았다 하면 그 파장은 세계 전역을 흔들었다. 전 세계가 그를 위해 기립 박수를 보냈고 다음 또 한 판을 손꼽아 기다렸다. 얼마전 유명을 달리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에 대한 내 나름의 평가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남준의 이 비범을 나는 그의 작품에서 찾지 못했다. 나 스스로가 이 분야에 철저히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그의 작품보다는 오히려 이 작품 하나 하나에 붙여진 작품 이름에서 예의 비범을 느꼈다.
지금부터 만 20년 전 파리 주재 시절, 그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퐁피두 기념관으로 달려나가 불시의 인터뷰를 벌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84년의 첫 작품에 ‘굿 모닝, 오웰 씨’라는 희한한 제목을 단 경위부터 물었다.
“오웰이라는 친구 말이지, 그의 책 ‘1984년’에서 뭐라 썼는지 알아? 1984년이 되면 모든 전자 미디어는 압제자나 독재자의 도구로만 쓰이게 된다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TV는 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오락도구로 쓰이고, 그래서 국제간의 이해에도 크게 공헌한다고 나는 믿거든”
오웰한테 그의 논리가 틀렸다는 걸 전하기 위해 ‘굿 모닝…’이라 빈정대는 인사로 고별을 고했다는 것이다. 그의 반말이 싫지 않았다.
- 86 아시안 게임을 대비한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제목은?
“키플링 역시 망발을 했어. 동양과 서양은 앞으로는 결국 만나지 못한다는 예언적 저주를 내뱉었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는 걸 작품으로 입증시키고 싶었던 거야”
화제는 당시 파리 그랑 팔레 국립미술전시관에 전시됐던 그의 작품 ‘달은 최고(最古)의 TV’로 넘어갔다. 달의 정감과 신비를 재현한 작품으로, 이에 대한 그의 언급 역시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다.
“서양에는 이미 학문과 학문, 또는 예술과 예술 사이의 공백을 설명하는 용어가 나타난 지 오래야. 영어의 Inter Discipline이라는 용어가 바로 그건데, 이웃 일본만 해도 이와 비슷한 학제(學際)라는 말이 하나의 용어로 굳혀져 있거든. 내가 말하는 전자예술 또는 비디오 아트가 바로 이런 인터 디시플린의 역할을 맡는 거야. 지금 이 시대는 단순한 독립 예술이나 독립 학문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분야가 너무나 많거든”
별종이었다. 그러나 별종치고는 너무나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라서 놀라웠다. 툭하면 언론은 그를 클린턴 부부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기행과 기벽의 소유자로 묘사해 왔지만 해프닝을 즐기기엔 그의 두뇌는 너무 조직적이었고 명석했다.
그가 명언처럼 남긴 “원래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야”라는 말도 그렇다. 매스컴의 주의나 끌려는 희화적 표현으로 보기엔 너무 무겁다. 이 대목과 관련, 파리에 살던 한 한국화가로부터 들었던 실화 한 토막이 떠오른다.
귀국 전람회를 앞둔 화가가 문재(文才)가 뛰어난 모 기자를 찾아가 그림 제목을 달아줄 것을 청했다. 기자는 그림 하나를 짚더니 선뜻 “촛불을 밝혀들고 홀로 울리라”라 명명했다. 전람회 첫날 그 그림은 화가의 생애 중 최고로 비싼 값에 팔렸다. 고객은 그림을 보고 사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 대해 정작 백남준은 뭐라 말했을까. 더구나 생소하기로 둘째가라면 아직도 서운해 할 작금의 비디오 아트 분야에서. 백남준이 토해낸 예술 사기… 운운은 그런 의미에서 천재화가 이중섭이 남긴 유언”내가 세상을 속였던가 봐…”와 상통했던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3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백남준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그렇다면) 당신 눈에 한국인은 어떻게 보입디까?
“중국인의 조상은 농부이고 일본인은 어부이고… 한국인은 사냥꾼이 그 조상이야. 억세고 공격적이지. 물건은 일본 사람이 잘 만들지만 소프트웨어의 경쟁시대에는 우리가 유리할 것이 분명해. 67년쯤인가, 컴퓨터를 처음 손에 만지면서 느낀 건데, 아, 바로 이거다, 이거야말로 한국 꺼다! 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더군”
그가 남긴 이 주술적 예언, 내 기자생활 30년이 건져 올린 가장 찬란한 결실이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이 마지막 답변을 그의 영전에 조사로 바친다.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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