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일을 여는 페이지

2006-02-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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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일기 쓰기를 세번 시도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누나로부터 일기장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게 나의 첫 번째 시도였다. 몇줄씩 쓰도록 디자인된 작은 공간에 나는 거의 매일 일년동안 일기를 썼다. 고등학교 때는 신년을 맞이하여 친한 친구와 새해부터는 일기를 쓰기로 약속했다. 이 역시 일년 정도 유지하였는데 그 속에는 10대의 고민과 자아 추구에 관한 글로 가득하다.
20대에 한국에 갔을 때 한국에서의 생활을 날마다 기록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한 적이 있다. 그 약속을 나는 지켰다. 1972년 11월에 시작하여 1974년 9월까지 쓴 일기장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1,013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에 나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어디서 그런 훈련과 끈기가 생겼는지 놀라워하고 있다.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할 것 같다.
돌이켜 보며 생각하는데, 아마 그 때 이국 땅에서 외로운 나에게 일기장은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었으며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치료법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살았던 690일은 나의 인생의 진로를 잡아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난날을 회고할 때 ‘한국 전’과 ‘한국 후’로 나누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다른 20대 청년처럼 나에게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결혼이었다. 이 중대한 순간이 한국에서 썼던 일기장 여섯권 중 네번째 일기장에서 일어났다.
지난주 우리집에서 글쓰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날의 주제는 일기 쓰기였다. 나는 먼지 쌓인 네번째 일기장을 꺼내 멤버들과 나의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의 경험을 나누었다.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진 몇줄을 나는 읽어 주었다. 어느 멤버가 “마치 대하소설의 시작과 끝 같다”라고 칭찬하였다. “감사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중간에 들어갈 이야기를 채우는 것이다”라고 나는 응답하였다.
일기장 첫 페이지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1973년 11월28일. 이것이 네번째 일기장이다. 일년 동안 3권의 공책을 채웠다. 매일 일어나는 사소한 일을 적은 나의 일기장을 읽는 사람이 심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당신이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나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엿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새 공책의 페이지처럼 나에게 나의 미래는 백지이다. 장래에 무슨 일이 있을지 나는 예측할 수 없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까? 새로운 애인을 만날까? 위급한 일을 만날까?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다. 자, 새로 시작하자”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네 번째 일기장에 적힌 한국에서의 나의 생활에 끝을 맺었다. 지난 77일 동안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나는 되돌아보며 엿볼 수가 있다. 믿지 못할 만큼의 짧은 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 일기장을 시작하였을 때 나는 그녀의 이름이 ‘미스 김’이라는 정도밖에 몰랐다. 주님, 나의 기도를, 나의 소망을 들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왜 나의 발길을 한국의 이 작은 도시로 인도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1973년 12월13일”
모임이 끝난 후, 나는 ‘오늘의 페이지’를 넘겨서 ‘내일 페이지’에 적힌 인간으로서의 불가능성에 관하여 명상하였다. 그 다음날 나는 보험회사로부터 예상하지 않았던 550달러 수표를 받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갑자기 이가 부러져 치과의사를 방문하면서 그 수표를 사용하였다. 수표가 화요일에 도착하고 수요일 날 치과에 갈 것을 어찌 추측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맞는 말이다. 내일 수표가 올지 아니면 이빨이 부러질지 그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교육학 박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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