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녀와의 펜팔

2006-01-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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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자로 ‘THANK YOU’만 겨우 쓰던 귀여운 손녀 리사가 이젠 예쁜 필기체로 새 학기를 맞이하는 마음을 적어 보냈다. 상냥하고 재미있는 미세스 로미가 담임선생이 되고, 친한 친구 발레리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들이다.
지난 핼로윈 때는 친구들과 함께 이집 저 집에서 받은 캔디를 먹지 않고 두었다가 다가오는 성탄절에 할머니를 만나면 드리겠다는 정성어린 사연을 보내오기도 했다.
어느새 단풍든 뒤뜰의 감나무 잎을 혼자 보기 아까워서 편지와 함께 보내면 리사도 집 앞의 은행잎과 단풍잎을 넣은 답장을 보내온다. 이렇게 주고받은 편지가 어느새 작은 상자를 가득 채운다.
오리건에 사는 손녀딸과의 편지는 아이가 1학년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학년이 된 손녀에게 용돈 10달러와 함께 예쁜 종이에 짧은 글을 몇자 넣어 보낸 것이 시작이 되어 몇년째 친한 친구처럼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전화로 몇마디 주고받는 것보다 잠깐 틈을 내어 책상에 앉아 사랑하는 리사의 얼굴을 그리며 정을 나누는 이 할머니가 얼마나 로맨틱한가.
리사는 어느새 5학년이 되고 용돈도 50달러가 되었다. 이젠 1달러를 쓰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쓰고, 때마다 식구들의 취향을 알아서 예쁜 카드와 선물을 준비해 삼촌, 작은 엄마 그리고 사촌에게까지 보내는 예비숙녀가 되었다.
이 메일, 셀폰 등 통신수단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직접 펜을 들어 누구를 향하여 자기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받는 이의 마음도 보내는 이의 마음도 얼마나 즐겁게 하는지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리사가 편지에 유일하게 한국말로 쓰는 ‘할머니’란 단어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나 자신의 정다운 할머니를 생각게 한다. 6.25 전쟁 중 피난살이에서 잠결에 쿵쿵 소리를 듣는 듯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소복이 담긴 하얀 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백설기 놓인 생일상이 차려 있었다. “열살까지는 백설기를 먹어야 튼튼하고 행복하게 잘산다”고 하시면서 환한 웃음을 웃으시던 나의 할머니가 그립다.
백설기 덕인지, 지금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보다 훨씬 많은 나이를 아직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 우리 리사도 부디 착하고, 예쁘게 그리고 건강하고 반듯하게 잘 자라서 장차 이 사회를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는 여성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박희경/몬트레이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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