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니의 기도

2006-01-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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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능선이 아름답게 이어지는 이 곳 마운틴 하이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내가 어릴 때는 눈이 오면 지척을 분별키 어려울 정도로 많이 오고 추웠다. 바람이 몰아치고 온통 얼어버리면 정신을 가다듬기조차 힘겨웠다.
먼동이 트기 전에 어머니는 사람의 키 반만큼 쌓인 눈길을 더듬으며 시오리 먼길에 있는 교회당을 찾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언제나 자식들 걱정에 사무치는 간절한 기도였다.
내가 서울에서 많은 시련으로 힘들게 지내던 시절, 견디기 어려울 때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고향집이었다.
그 날도 추수를 거두고 난 들녘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일손을 쉬지 않고 있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벼이삭을 고르시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넘어질 듯 달려오신다.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띠고, 손을 흔드시며 “여기 좀 보시오. 저 잘 생긴 우리 아들이 서울에서 와 유” 소리치셨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식이 자랑스러워 형용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른 그 때 어머니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목이 메어 오고 애틋한 그리움이 솟아난다.
어머니는 내 인생에서 늘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었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로 밝히는 등불이었다.
내가 어려움을 견디고 외로움을 극복하며 지탱해낸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문 밖까지 달려나와 얼싸 안는 애끓는 모정이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어머니는 내가 치열한 사회생활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였다.
어머니에 대한 감동은 너무나 많다. 어머니는 일터에서 샛밥으로 감자를 얻어도 자식들 생각에 차마 먹을 수가 없어 콩잎으로 싸서 품속에 담고 한걸음에 달려오시곤 했다. 아직 식지 않은 감자를 하나씩 나누어주며 “내 새끼들, 어 여 먹어라. 배고프지?” 하셨었다.
문전옥답을 하루저녁에 날려버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술에 취한 아버지와 주렁주렁한 자식들 걱정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으셨던 어머니. 생계를 홀로 이끌고 먹고살아야만 하는 기막힌 생활에서 어머니의 삶은 처절한 고난뿐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묵직한 돌덩어리를 이고 힘들게 언덕을 넘어오셨다. 끼니 걱정이 태산 같았던 보릿고개 시절로 기억된다. 그 때 어머니의 얼굴은 백짓장 같이 기진한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금방 쓰러질 듯 기진한 어머니는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 후 외가에서 얻어온 다듬잇돌은 우리 집 보물 1호가 되었다. 훗날까지 고향집 윗목에는 그 때의 땀에 젖은 어머니 모습으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의복이 정갈치 못하면 더 없어 보이는 것을 마음에 두셨던 모양 이다.
어머니의 맺힌 한을 이제 겨우 이해할 것 같다. 끼니는 거르더라도 남한테 없어 보이기는 싫었으리라.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방망이로라도 두드려 내쫓고 싶으셨던 간절한 심정. 가난의 주름을 반듯이 펴서 환하게 입히고 싶었던 어머니. 어머니의 애틋한 정성이 눈물겹다.
어머니는 자식들 생각뿐이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착하고 반듯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기도를 하셨다.
가슴속에서 절절히 묻어 나는 눈물 어린 간절함으로 어머니의 기도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머니를 생각 할 때마다 자꾸만 울고 싶고 가슴이 미어진다.


안주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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