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일 작은 것의 행복

2006-01-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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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새해를 맞으며 우울해한다고 한다. 명절 후유증에 한살을 더 먹는다는 부담에 또 새해에 만들고 이루어야 할 신조 등으로... 나도 한동안은 새해가 되면 새로운 신조를 만들고 지키느라 부산을 떨곤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새해에는 지난해의 묵은 때를 털고 가뿐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계절의 변화는 그래 있는 것이고 새해도 그래 오는 것인 것을. 우리네 인간들은 철마다 변하는 환경에, 해마다 돌아오는 새해에, 자연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기어 따라 흐르면 되는 것을.
올해는 그렇게 시작하기로 했다. 무리한 욕심을 낼 것이 아니라 빈 마음으로 최소한의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거다. 극소주의자라고 하면 맞을까. 미술에서는 간단명료한 선과 색상으로 표현하고, 패션세계에서는 흑과 백등 대조와 아울러 잡다한 장식을 제외하여 간단한 선을 강조한 스타일이라 한다. 쉽지 않은 만큼 잘하면 그만큼 더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게 극소주의리라.
삶에도 극소주의가 있다. 행복은 곧 극소주의가 아닐까 싶다. 행복은 빛나는 명예에 많은 재산에 대궐 같은 집에 내로라 하는 자리에 명문 명품의 꼬리표가 달린 건 아닐게다. 요란한 절차나 행사도 없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삶을 즐기는 것일 게다.
나에게 행복의 절반은 상상에서 온다. 주위에 널려진 일상에 조금만 상상을 보태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동틀녘이나 해질녘의 불을 켜지 않은 채 일하는 걸 즐긴다. 옛사람들이 등잔 기름을 아끼려고 어스름한 조명 아래 그렇게 일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은 백년전의 가난한 옛 개척민이 되어 손수 불을 일구고 빵을 만드는 기분으로 어스름한 빛 아래 부엌에서 저녁을 짓노라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넘치는 호강으로 느껴진다.
식구들과 바다로나 산으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준비가 없이 우리는 허름한 담요 한 장 둘둘 말고 빵 한 조각, 열매 한 웅큼이나 치즈 한 조각에 큼직한 물 한 병만 달랑 둘러메고 떠나길 좋아한다. 한 나절 걷다보면 꿀맛 같기만 한 그 빵 한 조각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다. 모험의 길 떠나는 옛 동화의 주인공이 한번 되어 보는 거다. 길가다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면 우린 기꺼이 빵 한조각 물 한모금으로 그를 살려내리라.
며칠전 한 서울 친구가 부쳐준 책에 담겨있던 얘기 몇편이 생각난다. “배고픈 날 장떡 지지던 냄새” “싸락눈 내리던 날 눈물의 부침개” “노티를 꼭 한점만 먹고 싶구나”... 가난했던 옛 시절의 첫 사랑만큼이나 애틋한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 나는 내 추억이 아닌데도 눈물이 났다. 가슴 가득한 감동, 그것도 행복이었다.
그 가난한 시절엔 밀가루에 고추장이나 채소밖에 못 넣고 만든 장떡이 모두가 군침 흘리며 기다리는 특식이었다지 - 이것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에 필요한 건 단 한웅큼의 상상력뿐이다. 가난한 마음뿐이다.
그래서 나는 올해 가난한 마음으로 내 삶을 줄이며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보려 한다. 대신 푸른 산하를 산들바람을 넓은 하늘을 한껏 품어 보려 한다. 그리하면 그 옛날 꿈도 추억도 사랑도, 내가 그리던 모든 것이 보일 것만 같다.
버리면서 얻는 행복.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박정현
IT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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