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명록

2004-06-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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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여명이 사는 뉴욕주의 작은 마을 쿠퍼스타운은 야구선수나 감독에게는 일종의 ‘성지’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기라성 같은 선수와 감독의 초상화를 걸어 놓은 명예의 전당이 있기 때문이다.
현역생활 10년, 은퇴 후 5년, 타자는 3,000 안타, 투수는 300승이 기본 요건이다. 전미야구협회 회원 가운데 취재경력 10년 이상인 베테랑들에게서 75%의 지지를 얻어야 명예의 전당에 들어설 수 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나 감독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친지, 고향 사람들까지 뿌듯하게 한다.
야구 외에도 풋볼이나 아이스하키, 골프 명예의 전당도 있다. 프로골퍼 박세리 선수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는 소식에 한국은 물론 한인사회까지 덩달아 박수를 보냈다. 1967년부터 지금껏 고작 19명이 오른 LPGA 명예의 전당에 뽑혔으니 우리 모두에게도 경사였던 까닭이다.
스포츠뿐 아니라 연예계에도 기억할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그 이름이 남는다. 할리웃 블러버드의 맨스 차이나 극장 인근 보도에는 영화배우와 감독들의 손바닥과 발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분야에서 큰 획을 그은 사람들을 기리는 뜻에서 이들의 이름을 황동으로 바닥에 박아 놓아 사람들이 오며가며 볼 수 있게 했다.
LA를 찾은 관광객이 할리웃 블러버드의 ‘명성의 거리’에 각인된 스타의 이름을 보는 것은 필수코스이다. 인근 3-4개 블록에 스타 2,000여명의 이름이 깔려 있지만, 떠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수많은 연예인들에겐 그야말로 언감생심 넘보기 어려운 곳이다.
이름 남기기는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기본적 욕구이다. 그래서 살아생전에 명예롭게 이름을 남기려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저마다 무진 애를 쓴다. 다양한 학술 분야와 세계 평화 등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노벨상 수상자 선정에 지구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 욕구의 투영이다.
세계적 인명사전인 ‘Who’s Who in the World’에 한국인이 간혹 등재될 때 언론에서 주요기사로 다루는 연유도 개인의 명예가 사회와 국가의 명예로 전이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미주한인사회에서도 커뮤니티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모아 인명록을 발간할 계획이다. 당사자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보답과 함께 후대의 모범으로 삼기 위함이다. 주류사회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기부자의 이름을 빼곡이 적은 판을 게시하는 것도 같은 취지에서다.
명예의 전당, 명성의 거리, 인명사전, 인명록 등은 소위 ‘양화’를 번성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 만으론 부족함이 있다. 이젠 ‘악화’를 몰아낼 오명의 전당, 오명의 거리, 오명사전, 오명록 등이 필요하다. 피땀 흘려 개미처럼 모은 남의 재산을 등친 파렴치한 사기꾼들의 이름을 남겨야 한다.
개개인의 피해뿐 아니라 커뮤니티 경제 환경을 오염시키고 한인사회의 이미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사회악을 더 이상 실정법의 단죄에만 의존할 수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각종 사기사건에 신물이 나 있다. 약삭빠른 사기꾼들에 당한 뒤 땅을 치는 모습은 울화통이 터지게 한다. 이젠 실형을 선고받은 대형 사기꾼들의 이름과 죄상을 또렷하게 기록해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심판대 위에 세워야 한다. 자신의 죄과가 당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기존의 한인 단체가 나서든 아니면 가칭 한인사회정의구현회를 결성하든 이번 기회에 손을 써야 한다. 한국에서는 ‘LA 똥포’로 미국에서는 ‘어글리 코리언’으로 불리는 데는 잇단 사기사건에 대한 우리의 안이한 대응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동포를 피눈물나게 하는 사기꾼이 어떠한 대접을 받는지 똑똑히 보여주어야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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