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찬호, 리이터를 본받아야

2004-05-28 (금) 12:00:00
크게 작게
<스포츠 포커스> 이정훈 기자

찬호가 죽을 맛이다. 재기는커녕 2승4패, 방어율 5.80으로 떨어지며 천덕꾸러기로 떠오르른 박찬호는 설상가상 26일 ‘15-Day’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찬호 왜 이럴까? 텍사스 지역은 연일 ‘찬호 포기’를 아우성치고 있고 찬호는 찬호대로 정신적인 곤혹감 속에 재기 의지를 상실해 가고 있다. 시즌 초만 하더라도 13승 정도는 거뜬히 올릴 것으로 예상됐던 박찬호는 기대했던 강속구가 구위를 찾지 못하며 방어율 6점대로 난타 당하고 있다. 방어율 5.80이면 메이저리그 최하위급 투수에 속한다. 그것도 연습용에나 딱 알맞은 구위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방어율 5점대는 자존심의 한계선이다.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알리는 자명종이 울린 것이다.

그러나 찬호는 원한다고 해서 떠날 수도 없는 것이 딜레마. 몸값이 워낙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재기, ‘먹튀’의 누명을 벗는 길만이 살 길이다. 그러면 박찬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텍사스가 몸값을 포기하고 트레이드하는 것이 찬호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사실 박찬호는 처음부터 텍사스(레인저스)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텍사스에서 막중한 에이스 임무를 담당하느라 사실 박찬호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막중한 압박감에 시달려 왔다. 탈 꼴찌가 시급한 텍사스는 찬호의 부진을 참아주지 못하며 연일 성토, 여지껏 정신적으로 편해본 날이 없었다.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텍사스로 이적한 순간부터 몰락이 시작되었다. 지명대타 제도가 있는 아메리칸 리그는 내셔널리그에 익숙한 박찬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박찬호가 다시 내셔널리그로 돌아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레인저스가 몸값을 포기하면서까지 찬호를 내보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찬호로서는 죽으나 사나 레인저스 귀신이 되어야 할 팔자다.


지난주 텍사스 레인저스의 전 단장이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박찬호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 박찬호의 구위가 향상, 예전의 박찬호는 아니더라도 제 4, 5선발은 거뜬히 소화해낼 것으로 내다 봤다.
그러나 박찬호 자신의 각오는 다른 것 같다. 박찬호는 이기고 있을 때나 지고 있을 때나 마운드에서 흔들리며 전혀 신뢰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자이언츠의 커크 리이터가 올 시즌 방어율 5.24, 1승4패로 난타 당하면서도 여유 만만한 것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박찬호와 리이터는 초년시절부터 종종 비교되던 투수들이었다. 연봉은 비록 박찬호가 2배 이상을 받고 있으나 120승77패 의 리이터나 92승69패의 박찬호나 크게 다를 바 없는 투수들이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로 10여년간 프로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리이터는 재작년 스트라이크존이 좁아지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바깥쪽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잡아주지 않자 작년 10승5패로 10승에 턱걸이 하더니 올 1승4패로 주저앉으며 주위를 불안케하고 있다.

그러나 리이터 자신의 각오는 다르다. 자이언츠 단장 브라이언 세이빈의 말대로 리이터야 말로 자신의 약점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경기를 운영하고 있는 선수이다. 리이터는 마운드에서 타자들을 압도하기보다는 몇 점 주더라도 근접한 경기를 이끌며 팀에 승리할 기회를 주는 것이 사명이라는 각오로 경기에 임하고 있다. 26일 경기에서도 리이터는 7회까지 3실점, 역전 당한 뒤 강판 당했으나 근접한 경기를 이끈 덕에 자이언츠의 1점차 역전승의 주도 역할을 담당했다.
메이저리그 10년 경력의 찬호 역시 제 2의 리이터가 되지 말라는 법 없다. 마운드에서 한 두 게임 난타 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찬호에게 필요한 것은 여유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