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 시민권자 징집 무엇이 문제인가

2004-05-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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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법 적용’해외 인재 활용 못해

징집대상 체류허용기간 현실에 맞게 늘려야
입대 강요 말고 영어자산 선용방안 모색을
병무청 ‘한인변호사 간담회’ 법개정 계기로

미 시민권자 한인들의 징집파문이 일자 한국정부가 법개정 가능성을 열어 놓고 현지 사정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이의 일환으로 병무청이 이 달 말 해외 한인사회의 변호사 10명을 서울로 초청해 의견을 듣는다. 세계화 조류를 거스르는 조항들을 고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한국 병역의무 해제는 35세 되는 해의 12월31일. 미국에서 태어난 Y씨는 올해 34세. 2002년 11월 외국 증권회사의 서울지점 근무를 발령 받고 일해 오다 지난해 11월 소집영장을 받았다. 한민족의 피를 받았으면 호적에 출생신고를 했든 하지 않았든 누구나 한국인이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국적이탈 신고를 해야 하는데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Y씨는 국적이탈 신고를 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국적이탈은 18세 이전에만 가능하다. 설령 이 나이 규정에 저촉되지 않더라도 17세 이전에 수학이외의 목적으로 1년 이상 한국에 체류한 경우엔 애당초 국적이탈을 할 수 없다. 영리를 목적으로 체류해도 문제가 된다. Y씨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연세대학 한국어학당을 다니면서 한국 회사에 다녔었다. 이로 인해 ‘영주목적 체류’로 판정 받았다.
Y씨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외국회사에서 ‘한국통’으로 인정받아 한국의 세계화에 동참할 기회를 얻었으나 한국정부는 ‘전근대적인 규정’만을 곧이곧대로 적용하려 했다. 국경의 의미가 예전 같지 않고 경제 사회 문화적 교류가 활발한 세상이다. 미 시민권자가 한국에서 1년 이상 머물며 직장을 다녔다고 해서 ‘영주목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경직된 사고의 단면이다. 영주목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기간을 수년으로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18세 이전 국적이탈 신고’ 의무화 조항에서 연령을 산정하는 방법에도 흠이 있다. 나이를 따질 때 생일을 기준으로 삼는 게 상식이다. 18세가 되는 해 생일이 지나면 18세이고 그 이전엔 17세로 여기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병역법에는 생일이 지나지 않아도 해가 바뀌면 한 살을 더 먹은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 올 12월에 18세가 되는 사람이라도 병무청 계산법으로는 지난 1월1일부터 이미 18세가 된 것이므로 국적이탈 자격을 상실한다.
법의 자구는 그렇다고 치자. 실질적으로 보더라도 미 시민권자를 한국군대에 집어넣는 것은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는다. 같은 민족이라고 해도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당장 부닥치는 언어장벽은 미 시민권자를 일종의 ‘장애인’으로 만든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2002년 9월부터 서울의 한 사설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 C씨는 지난 1월 징집됐다. 그는 원어민 강사일 뿐 한국어는 모른다. 한국어에 관한 한 반귀머거리, 반벙어리다. 군에서 애용되는 좌측, 우측이란 단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준인데 과연 내무생활을 어떻게 할 지 알 수 없다.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군대 생활은 만만하지 않다. 인정사정 없는 곳에서 ‘언어장애’가 얼마나 포용될 지 의문이다.
군대에도 부담이 된다. 의사소통이 잘 돼야 굴러가는 군대에서 ‘언어장애’는 치명적이다. 개인적으로나 부대 전체로나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다. 위화감이 조성되고 당사자는 쉽게 ‘왕따’가 될 수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에서 징집되는 해외 한인이 미시민권자 50여명을 포함해 연간 200명에 이른다고 한다. 굳이 앞 뒤 물정 모르는 미시민권자를 징집해서 군사력이 얼마나 증대될 것인가. 한국의 세계화에 일조할 젊은이들이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된다면 득이 될 게 없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되는 한민족 네트웍을 하나 둘 잘라낼 뿐이다.
병역법 64조 2항은 ‘국외에서 가족과 함께 영주권을 얻은 사람은 징병검사를 하지 않고 병역을 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해 해외 한인들에 대해 융통성을 발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 집행은 딱딱하고 빡빡하다. 징집연령의 미시민권자의 한국 체류 허용기간이 짧은 점 등은 한국 내 활동을 제한하고 운신을 옥죈다.
법은 지켜지기 위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란 명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동시에 법은 고쳐지기 위해 존재한다. 의회의 입법기능이 활성화하길 바라는 민심이 이를 대변한다. 한국의 병역법도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에 사는 청년들에게도 시대에 걸 맞는 병역법이 필요하다. 한 다리 건너인 미 시민권자를 적용대상으로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해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규정을 전향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미주 한인회총연합회가 얼마 전 병역법 개정안을 마련해 한국정부에 제안한 것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한인회총연합회는 개선안에서, 첫째 기본 군사훈련을 마친 뒤 국방부 산하 교육기관에서 영어강사로 복무할 수 있고, 둘째 2년2개월로 돼 있는 복무기간을 병무청장의 요청에 따라 1년 이내로 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교포들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셋째 장애인에게 적용하는 6개월 복무 규정을 ‘한국어 장애인’인 교포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영어강사는 비단 정부기관에 국한할 게 아니라 정부가 인정하는 교육기관에까지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 또한 병역법에 명시된 ‘국제협력 요원’의 자격을 완화해 교포들을 포괄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교포들에게 특혜를 준다며 질시의 눈으로 볼 게 아니다. 해외 인력을 적극 활용해 야 한다는 시각이 요구된다. 주눅이 든 이공계 출신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복무 혜택을 강구하는 것처럼 한국의 세계화를 도울 해외 한인들을 ‘20세기 병역법’의 잣대로 징집하는 것은 재고할 가치가 있다.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누구나 입대해야 하는 개병제를 채택하고 있으니 국방의무가 민감한 사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반도의 긴장상태는 냉전시대와 다르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앞으로도 화해와 군축이 대세가 될 것이다. 한 명이라도 더 징집해야 할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인력을 다른 쪽으로 전환해 국익에 플러스가 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
여러 가지 제안을 좀 더 매끄럽게 손질하는 작업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병역법 조항을 손봐야 한다는 공감대의 형성과 이를 추진할 의지가 긴요하다. 서울서 열리는 병무청 간담회가 그저 모임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알찬 내용을 도출해 내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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