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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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청소년들의 ‘왕’

2004-03-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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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옛날 마음이 따뜻한 왕이 있었다. 그는 생명의 존귀함을 실천하면 살았다. 비단 사람뿐 아니라 숨쉬는 모든 존재를 제 몸처럼 여겼다. 하루는 비둘기가 겁에 질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어디선가 날아와 왕의 옷 속을 파고들며 바들바들 떨었다.
왕은 비둘기의 ‘기습’에 당황했다. 이내 매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 매는 먹이 사냥하러 비둘기를 추격해 온 것이다. 나무 가지 위에 앉은 매는 왕에게 “비둘기는 내 저녁이니 당장 돌려주십시오” 했다. 왕은 “비둘기를 내어주면 네 먹이로 죽게되는데 어찌 생명 체를 헛되이 버릴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다.
이에 질세라 매는 “비둘기를 먹지 못하면 나도 연명하기 어려운데, 그렇다면 나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나는 갓 죽인 날고기를 먹고 싶습니다” 하고 반박했다. 날고기를 마련하려면 반드시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여야 하는데 왕으로서는 딱한 처지에 몰린 비둘기를 내어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왕은 결단을 내렸다. 나이가 많아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안 그는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매의 먹이로 대신 바치기로 했다. 다리 살을 칼로 베 매에게 주었다. 그러나 매는 비둘기의 무게와 같아야만 받아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쪽 다리 살을 더 베었다. 그래도 저울추는 비둘기가 더 무겁다고 표시했다. 왕이 두 발꿈치, 두 엉덩이, 두 젖가슴 살을 도려내 달아도 이상하게 무게가 별로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왕은 온몸을 바칠 각오로 저울에 올라서려다 그만 부상이 심해 쓰러졌다. 그래도 비둘기를 원망하지 않았다. 생명체의 존귀함을 지키려는 ‘살신’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왕은 “살을 베고 피를 흘려도 괴로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왕은 자비와 사랑으로 득도했고 몸은 정상으로 회복됐다.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생명에 지체 높은 왕이 베푼 지극 정성을 담은 불경 속 이야기이다.
마약의 마수에 시달리고 가없는 유혹에 신음하다 삶의 한 가닥 희망으로 갱생의 길을 걷고 있는 한인 청소년들을 친자식 마냥 보살피는 ‘중독자들의 왕들’이 있다. 얼마든지 고상한 일을 하면서 존경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피난처로 알고 찾아 온 청소년들을 귀찮다며 내치지 않고 거두어 준 사람들이다.
마약에 찌든 청소년들의 심신을 치료하고 보듬어주는 나눔선교회의 봉사자들이 그들이다. 선교회가 정부로부터 면허신청과 시설개선 명령을 받아 끌탕을 하자 마약재활기관을 돕겠다며 나선 한인교회 신도들도 ‘마약 청소년들의 왕들’이다.
지난해 나눔선교회 한 곳에 마약상담을 해온 사람이 3,410명이고 이 가운데 청소년이 2,372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청소년 마약 복용은 남의 일로만 도외시할 수 없다. ‘청소년 마약 밀물’은 이미 한인사회 앞마당까지 도달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썰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청소년 마약 사용자 60%가 선호하는 마리화나는 두뇌, 폐를 상하게 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할뿐 아니라 일단 빠지면 중독될 확률이 성인의 3배라고 한다. 가주 내 9학년 한인학생의 약 8%, 11학년 약 13%가 마리화나를 사용했다는 2003년 아태재단의 설문조사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니다.
마약은 사용자를 조용히 갉아먹으니 초기에 손을 쓰기가 힘들다. 그래서 마약 청소년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간절하다. 새 삶을 찾으려 애쓰는 청소년들에겐, 집을 뛰쳐나가 객지에서 심하게 방황하다 돌아 온 작은아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한 성경 속 아버지의 너그러움이 절실하다. 지난 과오에 대한 질책 대신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선사하는 어른이어야 한다.
가깝게는 내 자녀의 친구이고 멀게는 내 자녀의 또래들이다. 잘 키워 한인사회를 맡겨야 할 일꾼들이다. 비온 뒤 땅이 단단해지듯, 한 때 마약에 찌든 모습이라도 보다 강건한 자아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 교회에 쏟는 사랑의 10분의 1이라도, 사찰에 보태는 자비의 작은 토막이라도, 이웃과 나누는 정의 한 조각이라도 기꺼이 떼어준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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