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와 적의 메카니즘

2004-03-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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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친구는 친구’ ‘적의 친구는 적’ ‘친구의 적은 적’ 그리고 ‘적의 적은 친구.’ 아랍인들이 아끼는 격언이다. 아랍뿐 아니라 서구사회와 한국 등 동양에서도 회자되는 금언이다.
인간사회의 관계 정립에 효험이 있는 이 네 가지 경구는 1900년 중·후반 국제문제전문가들이 복잡한 유럽의 정세를 분석하는 이론적 틀로 사용할 정도로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엮는 처세술은 적절히 구사하면 경색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돌려놓는 촉매가 된다. 지난주 무투표 당선으로, 막을 올리기도 전에 걷어버려 싱겁게 돼 버린 오렌지카운티 한인회장 선거에도 ‘친구와 적의 메카니즘’의 처방을 내릴 만하다.
애당초 3월13일 치르기로 한 2년 임기의 18대 회장선거가 두 후보 중 한 후보의 자격상실로 표결 없이 끝남에 따라 두 후보 지지자들 간에 갈등이 표출될 수 있다. 갈등을 잠재우고 한인사회 화합을 유도하려면 ‘친구와 적의 메카니즘’이 안성맞춤이다.
첫째 경구인 ‘친구의 친구는 친구.’ 탈락자와 당선자는 모두 한인사회의 화합을 ‘친구’로, 분열을 ‘적’으로 간주했다. 화합은 탈락자, 당선자 모두의 ‘친구’이니 두 사람이 친구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문구인 ‘적의 친구는 적’을 보자. 탈락자와 당선자는 한인사회의 ‘적’인 분열을 배척했다. 분열을 획책하는 어떤 움직임도 ‘친구’로 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적’의 ‘친구’가 아니니 두 사람은 서로 적이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셋째 ‘친구의 적은 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인사회의 ‘친구’인 화합을 두 사람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도 화합을 적대시하지 않아 ‘친구의 적’이 아니니 서로 적이 될 수 없다.
마지막 경구 ‘적의 적은 친구’가 말하듯 탈락자와 당선자는 모두 한인사회의 ‘적’인 분열에 당당히 맞서겠다고 했으니 ‘적의 적’으로서 서로에겐 친구가 될 수 있다.
탈락자와 당선자는 어떤 경우에도 서로에게 ‘칼’을 들이댈 사이가 아니다. 화합을 위해서 밀어주고 당기는 사이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당선자는 14년만에 두 후보가 경선을 벌이는 멋진 한판이 되지 않은 데 대한 부담을 어느 정도 질 수밖에 없다.
지난 17대 선거에서도 두 사람이 출사표를 던졌지만 막판에 한 사람이 후보등록을 하지 않아 흐지부지된 것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는 이미 등록한 후보가 등록마감 직전 리버사이드 카운티로 이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후보자격을 상실한 것이지, 자발적으로 경선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무투표 당선인 것은 같지만 탈락자도 경선 채비에 들어갔었다는 점이 다르다.
당선자는 탈락자의 선거캠프에 지지자들이 많았고 이들이 일정 기간 캠페인을 벌였으며 아직도 허탈해 하고 있을 저간의 사정을 잊어선 안 된다. 자신들이 지지하던 후보가 당선되길 기대했다가 어이없이 탈락했으니 실망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무투표 당선과는 거리가 있다. 이를 고려해 상대를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공짜 당선’ ‘절반의 지도자’란 빈정거림이 있다. 어느 때보다 화합에 목말라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당당히 당선됐다고 해서 쥐꼬리만한 위세로 ‘마이 웨이’를 고집하지 않길 바란다. 한인사회와 한인회는 법이나 규정으로 연결되는 관계가 아니라 마음으로 통해야 할 공동체가 아닌가.
탈락자도 할 일이 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협력을 약속한다면 이번 선거에서 탈락했지만 언젠가 주거지에서 큼지막한 일꾼이 될 것이다. 수년간 한인회에서 봉사했고 모범적인 신앙인이며 특정 지역만을 위한 후보가 아니라는 자신의 신문광고대로, 몸은 옮겨갔지만 고향과 같은 오렌지카운티를 위해 경륜을 보태는 미덕이 절실하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새로 출범하는 한인회를 힘껏 도울 것을 독려한다면 남가주 한인사회 전체로부터 호평을 받을 것이다.
당선자, 탈락자, 그리고 지지자들 모두 ‘친구와 적의 메카니즘’을 음미했으면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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