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원죄론

2004-03-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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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하에 춘삼월 대설이 내렸다. 100년만에 일어난 기상이변이다. 이 뜻하지 않은 폭설로 경부 고속도로가 3일 동안 마비됐다. 대설-폭설이라고들 난리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50센티 정도의 눈이다. 미 동북부에 내리는 미터 단위에 비하면 별 게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나라의 동맥이 끊어지는 ‘대란’이 벌어진 것이다.
이유는 아주 분명했다. 당국의 ‘준비 안된 나태 행정’탓이다. 춘삼월 대설?--이 나라 관리들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기상청은 기껏해야 5센티 정도 눈발이 내리겠다고 예보했다. 그 정도면 춘삼월 봄기운에 녹지 않고 배기랴-- 도로공사도, 도청도, 중앙청의 나리들도 그렇게들 안심하고 퇴근했다. 도로에 뿌릴 염화칼슘도 태부족, 게다가 도로공사라는 관청에선 제설용 차량조차 보유하지 않았다. 경영 합리화를 위해 모두 민간에 불하했다나? 아니 기습 폭설에 제설 덤프트럭 몰고 나올 개인업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 한심한 자들은 중앙 정부의 고위 나리들이다. 그 알량한 ‘관계장관 대책회의’가 열린 것은 길이 마비되고 1만여명이 오도가도 못한 채 추위와 허기에 떨고 있다는 긴급 뉴스가 전해지고도 30여시간이 지난 뒤다. 허겁지겁 대책회의를 연다고 북새를 떨었지만 하늘이 말짱 갠 뒤였다. 대통령도, 총리도, 장관들도 누구하나 눈발 쏟아지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정도 사태에 대통령이 현장에 나갈 이유가 뭐냐고 대들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에 대처하는 당국 자세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나라 일 챙기기’의 한 단면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월25일로 취임 한 돌을 맞았다. 그의 등장에 많은 비판과 우려가 제기됐지만, 전임 80대의 쇠잔한 김대중씨에 고개를 내젓던 국민들은 50대의 건강한 대통령 등장에 국정의 활력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데 노무현씨는 이런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여전히 말로써 정치를, 행정을 하려 했다. 그의 언변은 유수 같았지만 정직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이리 저리 돌리며 현란한 어휘를 동원할수록 감동의 메시지는 실종됐다. 오죽하면 한 원로 종교인으로부터 이런 핀잔을 들었을까. “대통령이 말을 반만 줄여도 나라가 평온해지겠다.” 또 정치학자들은 유식한 말로 대통령을 비꼬았다. 노무현 정권은 ‘NATO 정권’(No Action, Talk Only), 즉 말만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정권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면 춘삼월 대설을 맞아 늑장 대책회의가 열린 것도 이 정권다운 모양새다. 한데 노 대통령과 집권세력들이 온힘을 쏟아 땀흘리는 한 분야가 있다. 4.15 총선거다. 총선 대승은 그들에게 절대절명의 과제다.
노 대통령은 아예 자기쪽 정당(열린당)의 승리를 위해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생각’이라고 공언하고 나섰다. 합법을 전제로 한 말에 왜 시비를 거냐고 하겠지만 내막을 보면 바로 한국적 후진성과 관련된 문제가 숨어 있다. 대통령이 열린당에 입당하고 그 정당을 밀겠다고 공언한 이상, 이 나라의 공무원, 재벌, 언론, 시민단체 등 말발께나 갖고 있는 쪽에선 정권 눈치보고 이왕이면 권력 가진 쪽에 붙으려는 게 한국적 풍토다.
이 점은 재야 출신인 노씨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시치미를 떼고 열린당 지원을 공개적으로 약속하고 나선 것이다. 손가락 세우고 ‘여기 붙어라’한 꼴이라고 야당이 아우성을 치고, 급기야 중앙선관위가 공무원 신분으로서 중립을 어겼다고 판정을 내리는 일까지 발전했다.
도대체 대통령이 법을 안지키는 나라에 무슨 정의가 존재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노씨쪽은 “대통령도 정치인인데 왜 정치적 발언을 봉쇄하느냐”라고 볼멘 소리다. 그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걸까. 대통령은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국가 원수다. 통치자다. 헌법과 법의 수호자다. 그러기에 취임 때 헌법에 손을 얹고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라고 국민 앞에서 선서를 하지 않았던가. 법을 지키지 않는 국가 원수라면 무슨 이유로도 존경을 받을 수 없다.
노무현씨의 후원자격인 김대중씨가 아직도 지분을 갖고 있는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고 있음은 아이러니이긴 하나, 이 지경에 이른 데는 노 대통령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야당과 반대세력이 못살게 구는 판에 그인들 무슨 수가 있느냐고 반론자도 있겠지만 이것도 하나밖에 모르는 소리다. 만약 노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마음을 비우고 국가원수로서 금도와 정직과 성실로 임해 왔다면 이유 없이 헐뜯는 쪽을 국민들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린당이 제1당을 차지하는 것도 무난할 것이다. 한데 그는 정치적 욕심에 사로잡혀서 이름하여 ‘노무현식 개혁’으로 포장된 ‘통치그룹 교체’다. 그래서 내편만 챙겨 요직에 앉혔다. 아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 내편들이 모두 검은 돈을 챙겨 집도, 자동차도 사고 열린당 당사도 임대해 주고 어딘가 숨겨 놓기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개혁이라고? 웃기지 말라’는 냉소가 왜 안 나오겠는가. 나라가 시끄럽고 경제는 뒷걸음치고 춘삼월 대설에 국가 동맥이 마비되는, 이 모든 혼란의 한 가운데 ‘가장 준비 안된’ 노 대통령이 서있는 셈이다. 그에 대한 원죄론이 고조되고 있음은 그 개인의 불행이자 국가의 불행이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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