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움직이는 사랑

2004-02-24 (화)
크게 작게
백내장 방치는 실명으로 연결된다. 실명의 가장 큰 원인은 백내장이다. 아시아의 최빈국 네팔에서는 실명 원인의 70%를 차지할 정도이다. 의료 체계가 엉망진창인 네팔에서는 일단 백내장에 걸리면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한다.
참담한 처지에서도 솟아날 구멍이 있듯이 장님이 돼 가는 네팔 주민들에게도 ‘구세주’가 있다. 안과전문의 산두크 루이와 제프 태빈이 바로 생명의 은인이다. 루이는 네팔 시골에서 태어난 토박이고 미국인 태빈은 히말라야 등반가였는데 루이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화돼 20여 년간 함께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루이는 방 한 칸 짜리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청빈하게 살면서 눈 수술에만 몰두하고 있다. 루이와 태빈 박사의 이웃 사랑은 앉아서만 하는 게 아니다. 네팔 고산지대에는 문명과 발을 끊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으니 시력을 잃어 가는 주민들이 치료받으러 내려올 수도 없다.
리우와 태빈은 약 10시간 걸리는 산동네를 걸어서 올라가 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파악하고는 중턱쯤에 간이 수술실을 만들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을 치료했다. 힘들게 산을 오를 때나 수술실에서 집도할 때나 리우는 오로지 앞 못 보는 이웃에게 밝은 삶을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전세계에 전파를 탄 이들의 선행은 ‘움직이는 사랑’의 표상이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봉사도 의미 있지만 움직이면서 하는 사랑과는 견주기 힘들다.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좋다. 하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 베푸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
한인사회에도 이러한 봉사자들이 꽤 있다. 특히 건조한 이민생활에 ‘영적 단비’를 내려주는 신실한 목회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하고 일요일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진리에로의 길을 안내하는 일은 숭고하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고 아물게 하는 성스러운 직분이다.
한 대형교회 목사가 3월 7일 일요일에 열리는 LA국제마라톤대회에 나서겠다고 했다. 일요일 교회에서 하는 봉사 대신 ‘움직이는 사랑’을 자청했다. 뛰면서 전도하고 불우이웃을 돕겠다고 했다. 신도 250여명도 동참하기로 했다. 동료 목사에게 예배를 부탁해 차질이 없는데도, 주일에 목회자가 예배를 주관하지 않고 뜀박질이나 하면 되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는 취지의 비난이다.
복음의 골자는 사랑이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은혜를 나누는 것도 거룩한 일이지만 밖으로 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도 소중하다. 목사에게 꾸벅 고개 숙이는 신도들에게 복음을 강조하는 것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덤덤한 표정을 짓는 일반인에게 진리를 설파하는 게 한결 어렵고 보람된 일이다.
게다가 이번 ‘사랑의 달리기’에는 한인들도 대거 참여해 뇌성마비, 정신지체, 자폐증 등 고통을 안고 사는 가여운 어린이들을 돕는 모금운동을 겸한다고 한다. 이렇게 뜻깊은 행사에 목회자가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을 생각하라는 복음에 충실한 것이다.
‘안식일’을 딱딱한 3음절 단어로만 여긴다면 예수도 혀를 찰 것이다. 힘들어도 달리면서 복음과 사랑을 전하겠다는 목회자와 신도들을 예수가 출발선에서 막아서며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경거망동하느냐”고 꾸짖겠는가. 예수가 자신을 고발하려고 트집거리를 찾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준 날도 바로 안식일이었다.
LA마라톤은 세계의 건각들뿐 아니라 장애인들도 휠체어를 타고 출전해 인간승리를 보여주는 빅 이벤트다. 용기, 격려, 사랑이 넘실거려야 할 한마당이다. 플라톤이 ‘국가론’(The Republic)에서 언급한 ‘동굴의 우화’에서처럼 굴 밖으로 과감히 나오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 ‘사랑의 달리기’가 교계는 물론 한인사회에 신선한 충격이 됐으면 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bongpark@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