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야당 몰락과 ‘희망가’

2004-02-2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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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당을 대표하는 한나라당 앞에 열려 있는 출구는 오직 하나다. 가지를 치고 밑동에 적당히 페인트칠을 한다 해서 낡고 더러워진 거대한 몸집이 산뜻한 뉴 스타로 변모할 리 만무하다. 한나라당은 이미 국민이라는 고객의 눈에 ‘추한 고목’의 형해로 투영됐다.
이제 그 몸통을 스스로 땅에 묻고 새 싹을 선보여 청라하고 곧은 수목으로 성장하지 않고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을 맞을 뿐이다. 고목이 쓰러질 때는 굉음이 나는 법이다. 지금 한나라당이 온통 풍비박산의 대혼란 속에서 지도체제가 무너지고 당내 소요가 그칠 줄 모르는 것도 그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진통인 셈이다.
나는 지난해 말, 한나라당이 기업들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받은 내막이 한국 검찰의 추상같은(?) 수사로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야당의 뿌리가 뽑혀나가더라도 썩은 부위는 잘라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같은 무게로 노무현 대통령과 집권세력들의 부정에 관해서는 가혹한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하며, 세간에 나도는 비리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노 대통령 자신도 깨끗이 거취를 결심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결과는 한나라당 쪽에서 먼저 일어났다. 대선 이후 한나라당을 지휘해 온 지도체제의 붕괴는 바로 병든 거인의 몸통이 대지 위에 쓰러지는 풍경과 흡사하다. 나는 한나라당의 내홍을 지켜보면서 ‘저대로는 안될 텐데’하고 걱정한 사람 중 하나다. 집권세력의 부정과와 무능력을 비판하고 정신 차리게 함에 있어 건전 야당의 존재와 역할은 필연이라는 신념에서였다. 하지만 떠난 이회창 후보나 새로 들어선 지도부의 태도는 한 마디로 미봉과 책임 회피와 자기 변명에 안주해 왔던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서 한나라당 쪽의 책임을 묻자면 이회창 후보를 빼고 누굴 지목할 수 있단 말인가.
700여억원이라는, 서민들에겐 평생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 돈을, 그것도 ‘차 떼기’니, CD(무기명 예금증서)니 하며 온갖 꾀를 다 동원해 긁어간 불법 행위의 책임을 그가 지지 않는다면 누가 질 것인가.
자금 모집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액수에 대해선 몰랐다는 게 측근들 주장이지만, 국민들로부터 ‘도둑’ 소리를 듣게 된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서는 그런 결과에 당연히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데 기자회견을 통해 “감옥을 가도 후보였던 내가 가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아직 이렇다할 결행이 없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선 때는 돈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최병렬 대표가 ‘이회창 책임론’으로 궁색한 입지를 돌파하려 했지만 당이 지나간 더러운 족적이 지워 질 리 없고 당만 만신창이가 됐다. 최 대표가 좀더 빨리 마음을 비웠다면, ‘차 떼기 자금설’이 터졌을 때, “한나라당 간판을 내리겠다”고 선언했어야 했다.
그래야 권력을 총동원한 노무현 정권에 맞서 얼마 남지 않은 총선거에 대비하고 새로운 면모로 거듭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만 했다면 “밉지만 어쩔 건가”하면서 야당 존재 의미에 무게를 주는 정권 견제세력들, 도무지 노무현이라는 이를 믿지 못하겠다는 중도세력들, 그리고 백로인양 부패와는 무관하다던 노무현 후보에 표를 던졌다가 울분에 젖어 있는 또 다른 ‘신 반노 세력’들과 새 둥지를 틀 수 있었으련만 그만 실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 당 지휘부가 물러나고 ‘헤쳐 모여’ 구호를 발한 뒤, 전세는 그나마 회복돼 가는 인상이다. 건전 보수로, 한국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히는 작가 이문열이 주변의 욕설을 들어가면서 한나라당 공천 심사위원장 자리를 맡는 대 도박을 수행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침몰한 잠수함 속의 토끼 신세”라고 한탄하면서도 “이제 바닥을 쳤으므로 물위로 떠오르는 순서만 남았다”고 희망가를 부르는 것을 보면 깊은 바다 밑에도 얼마간 햇볕이 들기 시작했음이 감지되고는 있다. 한나라당의 몰락은 지난 40여년 간 한국을 지배해 온 보수세력의 죄과와 무관치 않다. 40~50대의 나라 세우기와 지키기, 60~70년대의 잘 사는 나라 만들기 그리고 80~90년대의 민주화 뿌리내리기라는 역사과정을 주도하면서 건설 역군의 몫을 톡톡히 해낸 주역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기여에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움켜쥔 부와 권력속에서 부정과 부패의 달콤한 맛에 현혹돼 왔다. 신분이 높은 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성, ‘노블레스 오블리즈’라는 필수적 덕목을 팽개쳤다.
보수세력의 앞자리에서 큰소리 치던 전직 대통령들이 줄줄이 죄인 신세가 된 지경이고 보면, 무슨 할 말이 남았겠는가. 노무현 정권 출현은 바로 그들 세력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의 무계획한 투쟁 속에서 굴러 떨어진 의외의 승리였다. 과거 보수우익 정치의 수혜자였던 YS-DJ-JP, 이 3김씨들이 보수진영 붕괴의 씨를 뿌리고, 급진 좌파의 싹에 열심히 자양분을 공급했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은 알고 나 있는지.
이제 보수진영을 대표한 한나라당이 붕괴했다면 그 내재적 세력으로서의 보수의 몸통도 쓰러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통을 썩혀 새 싹을 틔워야 한다. 지금 이 시간, 보수 세력이 가슴에 담아야 할 최고의 화두는 단연 ‘보수를 보수(Repair)하자’는 일곱 마디일 것이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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