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 대통령에 보내는 공개서한

2004-02-10 (화)
크게 작게

이 달 25일이면 대통령 취임 한 돌을 맞는군요. 바닥에서 출발해 정상에 올랐던 만큼, 당신의 성취감과 희열이 남달랐을 것이며, 북악 아래 청와대의 4계를 내려다보는 감회 또한 어느 대통령보다 컸으리라 짐작됩니다. 한데 당신의 행복지수는 과연 얼마였을까, 공연한 궁금증도 가져 봅니다.
취임 후 반년이 지났을 무렵, 당신은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버럭 역정을 냈습니다. 다수의 거센 야당과 틈만 보였다하면 쪼아대는 신문들의 공세야 각오한 바겠지만, 내 편으로 믿었던 우군들까지 당신을 배신한데 대한 불만 표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재벌과 사용자측을 혼내고 있는 당신의 노동정책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염병을 던지며 거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민주노총이라는 ‘힘 센 압력단체’의 준동에 화가 난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민주화 운동에 관한 한 ‘노무현 하면’ 한 수 접어 주어야 할 판에 당신이 광주 5.18묘지를 방문했을 때, 좌파라기보다 친북에 가까운 한총련이 당신의 고귀한 사진을 짓밟고 난동을 부린 북새통에 뒷문으로 빠져 나와야했던 뼈아픈 일도 당한 뒤였으니 역정을 낼만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당신은 그 능란한 언변으로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내가 엄살 좀 떨었죠.” 공연히 해 본 소리라는 당신의 변명에 “별 대통령 다 보았다”는 볼멘소리도 터져 나온 가운데 당신은 국민들 마음을 다시 떠보는 발언을 했습니다. 당신의 부하들이 이런 저런 비리에 관련된 게 드러나자 터져 나온, 비장감마저 감돈 폭탄 선언-- “눈앞이 캄캄하다.
이렇듯 불신을 받은 형편에선 더 이상 대통령 자리에 있는 게 무의미하다”며 재신임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국민들이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쇼킹한 선언의 행진은 계속됐습니다. 당신 진영의 불법 대선 자금이 이회창 후보 쪽보다 10분의1을 넘으면 대통령을 물러나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4.15 총선이라는 최대의 고비를 앞두고 더 큰 승부를 걸고 있는 듯 보입니다. 짐작컨대 지금까지 나온 많은 정치적 선언들이 기실 총선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강적인 한나라당은 ‘차떼기 불법자금’으로 일단 반신불수로 몰아넣는데 성공했고, 당신의 모태격인 민주당은 ‘호남 지역당’으로 전락시켜 수도권에선 얼씬도 못하게 하는데 얼마간 성공한 듯 보입니다.
예견컨대 총선 결과는 한나라당과 열린 우리당의 제1당 경쟁으로 좁혀질 것이며, 당신의 우리당에 승산이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는 있습니다. 또 총선 후 제3당으로 내 몰릴 민주당을 흡수하는 시나리오가 성공한다면, 당신이 당총재로 취임할 우리당은 명실상부한 다수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해 ‘노무현 개혁’의 전위로서 확고한 지원자가 될 것입니다.
한데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당신 편으로 믿었던 민초들이 투표소에서 붓 뚜껑을 들고 어느 정당 후보를 찍을지, 그 속내는 바람과도 같습니다. 민심이란 느닷없이 방향을 틀고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요. ‘관권 선거’시비 속에서 당신의 우리당이 3당으로 전락한다면 기세 등등한 야당 앞에 당신은 벌거숭이로 노출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고립무원, 정말로 대통령을 그만 두어야할 사태, 이를테면 ‘국회 탄핵’이라는 불행이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1당이 되면 편할까요? 아닙니다. 야당이 죽기살기로 물고늘어지면 대통령 해먹기 힘들다는 소리가 또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당신의 행운과 나라의 안녕을 보장하는 것일까요?
현명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 그러나 너무 자주 들어 그 의미가 퇴색한 말, ‘마음을 비라’는 말이야말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충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정상에 오른 당신, 왜 저 진흙탕 싸움에 몸을 던지려 합니까?
저들의 더티 게임을 정리하는 공명정대한 레프리로 뛰어야 할 당신이 ‘황색 팀’의 주장이 된다는 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반측팀에는 휘슬을 불고,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높이 들어 제재를 해야 할 당신이 한쪽 팀을 응원한다면 그 후유증을 어떻게 감내할 것입니까? 새로운 시대에는 새 패러다임이 요청된다고 당신은 누차 강조했습니다.
대통령이 한 편에 서서 총선 대책위원장 역을 맡아온 게 과거의 낡은 정치관행일진대, 왜 그 구차한 역을 자임하는가 말입니다. 총선에서 선을 긋고 물러서기 바랍니다. 경제 살리기는 기본입니다. 한미관계를 복원해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도 당신의 책무입니다.
더 중요한 이슈는 탈 많은 대통령 중심제를 고치는 헌법 개정입니다. 내각제나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어 당신의 역할은 큽니다. 그 많은 일을 책임진 당신이 정쟁에나 휩싸여 탄핵대상이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기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 게 당신 자신과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안영모 <언론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