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 높이’ 전문인

2004-01-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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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형병원에서 20년 넘게 일해 온 한 한인의사는 경력이 쌓여갈수록 환자 보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했다.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전문인으로서 원숙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텐데 이 의사는 겸손해지기 위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환자의 건강을 책임져야 할 의사는 하루에도 여러 번 환자와 함께 아파해야 하는데 그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는 이 의사의 고백에는 본분을 지키려는 고뇌가 가득하다.
그러나 일부 자질 부족한 의사들이 물을 흐리고 있다. 인터넷 법률도서관에 기록된 ‘사람 잡는 의술’ 중 일부만 들춰봐도 섬뜩해진다. ‘마취전문의가 수술이 끝나기 전에 부주의로 산소공급을 중단해 환자의 심장에 치명타를 입혔다’ ‘신진대사 장애상태로 태어난 유아가 병원 측의 부주의로 뇌 손상을 입었다’ ‘당뇨환자를 세심하게 치료하지 않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불필요한 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중독성이 강한 치료제를 복용하다가 결국 약 중독자가 됐다’ ‘금속을 삼킨 아기가 의사의 오진으로 숨졌다’ 등등.
가정주부는 칼로 두부, 감자를 잘라 맛난 요리를 만들지만, 무예의 도 없이 기교만 익힌 검도선수의 칼은 언제든지 흉기로 둔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혼 없는 의술’은 의사와 환자 모두를 해칠 수 있다.
세속적인 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목회자도 한인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문인이다. 푸석푸석한 이민생활에서 마음을 촉촉하게 하는 성직이다. 목회는 자신을 온전히 버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베네수엘라 오지에서 가난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한 젊은 목사는 “언제쯤 그 험한 곳에서 다시 미국에 돌아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평생 그곳에 남게 되더라도 좋다”고 해 질문자를 무안하게 했다고 한다.
다운타운에서 수십 년째 새벽마다 무숙자들에게 빵과 옷가지를 나눠주는 한 목사는 큰 회당에서 수천 여명의 신도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소위 ‘잘 나가는 목회자’는 아니지만, 고된 목회의 길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일 목회자가 재물, 명예 등에 마음을 빼앗기면 목회에로 향한 마음이 갈라지게 된다. 저자거리의 갑남을녀가 세 치 혀로 민심을 오도할 수는 없지만, 소명에 충실하지 않은 목회자가 ‘신의 망토’를 걸쳐 입고 번지레한 말로 신도들의 영혼을 혼탁하게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 것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영혼을 믿고 맡긴 신도들까지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십상이다.
몸과 마음이 온전하다고 해서 도외시할 수 없는 게 법이다. ‘법치의 모델’인 미국이라 더욱 그러하다. 대다수 한인 변호사들은 절차탁마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의뢰인들을 보호하고 돕는다. 하지만 여느 전문분야처럼 변호사 세계에도 ‘미꾸라지’가 있게 마련이다.
영양가 없다는 판단아래 케이스에서 발을 빼거나, 의뢰인 허락도 없이 임의대로 합의를 보거나, 일보다는 수임료부터 챙기려는 얌체가 있다. 또 변호사가 게을러 법원에서 케이스가 반려되기도 한다. 성사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속여 돈만 가로채고 입씻는 사기꾼도 있다. 한동안 ‘잠수’해 있다 잊혀졌다 싶으면 두더지처럼 다시 등장해 마치 양심으로 똘똘 뭉친 전문인 행세를 하기도 한다.
최근 히스패닉 피의자의 변호를 맡은 한인 변호사가 ‘한인 피해자 측 증인으로부터 유리한 증언을 끌어낼 목적으로 뇌물공여를 시도한 혐의’로 기소돼 물의를 빚고 있다. “피해자 측에 피의자가 돈을 주면 받겠느냐고 했을 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하는 이 변호사의 유죄 여부는 곧 밝혀지겠지만 법만을 외곬으로 파고들어야 할 변호사로서 “잠시나마 한눈을 팔았다”는 지적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직업인들에게는 누구나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그러나 특히 환자가 몸을 내맡기는 의사, 영혼을 의지하는 성직자,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매달리게 되는 변호사 등 전문인의 경우 그 윤리는 한결 엄격해야 한다. 전문인은 지식과 권위로 자신과 주위를 환히 비추기도 하지만 자칫 모두를 송두리째 태워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문인들이 전문인다운 ‘눈 높이’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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