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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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순 그의 레슬링 인생 40년-90년대는 최고, 최악의 해

2004-01-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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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달라스 체육발전을 위해 헌신한 체육인을 꼽는다면 장윤순 레슬링 협회장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레슬링에 대한 열정은 미국은 물론 일본열도, 한국에까지 미치고 있다.
달라스 레슬링 팀을 미주체전에서 5번이나 우승케 한 장본인.
장윤순회장의 레슬링과의 인연은 1964년 전 남산공고(현 리라공고)부터 이다. 끈질긴 집념이 오늘에 그를 있게 한 가운데 66년부터는 신인선수권대회에 이어 전국체전에 출전하는 등 그 당시 레슬링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 당시는 프로레슬링 경기도 권투 경기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장윤순씨의 최고의 해는 아마 1975년 올림픽 선수권대회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 몬트리올 올림픽 한국대표 선수를 선발하는 3차 전에서 페더급 양정모 선수와 최종 자웅을 겨뤄 아깝게 준우승, 올림픽 티켓은 놓쳤지만 이로 인해 77년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 그랜 뷰 고등학교에 코치로 초빙돼, 미국 행에 오르게 됐다. 그의 미국에서의 코치생활은 미국 플라이급 올림픽대표, 캭 닐슨을 길러내는데 성공, 이때부터 그의 인기는 79년 달라스의 사우스 그랜페리 고교, 샘 휴스턴 고교, 맥아더 교교생들의 코치를 맏게 되는 폴리 아메리카 레슬링 클럽의 코치로 발돋움 하게됐다.
그 후 레슬링 계의 대부 격으로 젊은 후배들을 데리고 미주체전 레슬링대회에 감독으로 레슬링 계를 주름잡았다. 이때까지 그가 받은 공로패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 그 중 대한 레슬링협회 이건희 회장의 공로패, 일본 마이바 시장의 우수 체육인상 등은 그가 쌓아온 레슬의 금자탑이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전성기를 맞은 91년 88올림픽 레슬링 한국 대표 팀을 달라스로 초청, 오클라호마 언더덕스 레슬링 팀과의 경기를 치뤄 한국 레슬링의 위상을 높인 그는 92년 서울시 레슬링 협회가 주관하는 한, 미, 일 고교 대표들 친선경기에 참가, 미국선수들을 종합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일왕의 부인 쇼다 미찌꼬 오빠 쇼다 후미오가 이끄는 일본 관동지방 마이바 군마현 대표 팀과 친선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94년 2월 19일 그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덤블링을 하다 6피트 높이에서 거꾸로 추락, 머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한 것이 2달 후 풍으로 발전,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후에도 움직일 수 있는 한 그의 레슬링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오늘도 지난해 6월말 달라스에서 치른 미주 한인체전 레슬링을 포함, 군소대회 레슬링대회에 참가하는 등 레슬링 계의 대부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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