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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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하나가 탈북자들 살려요”

2003-11-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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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자유법안’지지 서명 자원봉사 원귀숙 할머니

▶ 고향땅 다시 밟는게 소원

해방 이듬해에 동생들과 월남했습니다. 일가 친척을 모두 그곳에 두고 온 저로서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법안이 탈북자들과 북한의 민주화를 도울 수 있다니 내가 안 나설 수 없지요.
최근 미 상원과 하원에 잇달아 상정된 ‘북한자유법안’이 한반도 통일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하며 노구를 이끌고 통과지지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인 할머니가 있어 화제다.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원귀숙 할머니(85). 탈북자인권보호단체 이지스재단(대표 남재중)을 도와 법안 지지촉구 서명운동에 자원 봉사자로 나섰다. 정신 없이 돌아다니며 이틀동안 120여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한인식품점, 식당 등 한인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있다. 찬바람을 막기 위해 겹겹이 옷을 받쳐 입고 운전도 손수 해야 하지만 두 다리가 아직 튼튼하니 감사하다. 낡은 차에서 가끔 이상한 경고 사인이 들어와도 상관 않는다. 이 일이 옳은 만큼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원 할머니가 월남을 결심한 것은 함남고녀 교사로 재직 중이던 46년. 북에 진주한 소련군의 횡포에 맞서 데모를 벌이던 제자들이 눈 앞에서 사상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다. 배후 세력을 조사하던 공산당이 교사들도 추궁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살 곳이 못된다고 판단했다.
서울에서 20여년간 교사생활을 하던 원 할머니는 공부가 하고 싶어 63년 다시 태평양을 건넜다.
“자수가 내 전공이어서 여기서도 양재를 배웠어요. 영국 윈저 공의 부인이 된 심슨 여사의 옷을 만든 유명 디자이너 ‘멤부셰이’를 아세요? 그가 내 스승이에요.
할머니의 자랑거리는 또 있다. 듀크대학 총장 부인의 옷을 많이 만들어줬고 린든 존슨 전 대통령 영부인의 머리 장식도 해줬다. 할머니의 실력을 인정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보자기 작품 기증을 부탁해와 조만간 하나를 헌사할 계획이다.
제 얘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왜 내가 늙은 몸을 이끌고 이 수고를 하는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원 할머니는 내가 하는 일이 이웃과 민족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 아니겠느냐며 한인사회가 이 법안을 분명히 지지한다는 사실을 의회에 알려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주변 사람들은 노인 아파트에 거주하며 늘 그래왔듯이 모든 일을 손수 하고 있는 원 할머니가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결혼 기회도 놓쳤다고 전한다.
못 돌아오는 한이 있어도 고향 산천을 다시 한번 밟아 보고 싶은 바람을 숨기지 못하는 할머니는 갈 곳이 많다며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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