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저 바라만 보고 있나

2003-11-1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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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현 편집위원

깨달음의 계기는 간접체험과 직접체험으로 나뉜다. 간접체험은 남의 말을 듣거나 남의 글을 읽음으로써 쌓을 수 있다. 직접체험은 스스로 수도생활을 하거나 사회에서 부딪힘으로써 얻을 수 있다.

깨달음은 그에 이르는 방법에 따라 깊이가 다르다. 설교나 강연은 편안한 자세로 부담 없이 들으면서 자각과 반성을 하게 하지만 자리를 뜨거나 고개를 돌리면 뜨거웠던 열기가 쉬 수그러든다. 쉽게 얻었으니 잊기도, 버리기도 간단하다.


독서는 조금 다르다. 남의 글을 읽는 작업은 수고스럽다. 몇 시간만에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 있지만, 며칠을 생각하며 읽은 부분을 다시 되짚어 가야 하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평생을 두고 여러 번 정독을 해도 새롭기만 한 책도 있다. ‘투자’한 것이 많으니 들어서 얻는 깨달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이 것도 결국 남 얘기이므로 ‘내 것’으로 소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

직접체험의 중요성은 여기서 부각된다. 평범한 사람이 수도자의 길을 걸으며 명상을 밥먹듯 하기는 어렵지만 사회 속에 파고 들어가 남과 충돌하면서도 깨달음을 체득할 수 있다. 보기 싫은 사람, 말하기 껄끄러운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나누려면 ‘큰 투자’가 필요하다. 자신을 ‘죽이고’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기투합까지 한다면 더 없는 깨달음의 기회다.

얼마 전 한인 단체장들이 재외동포법 개정현황 설명회에 모여 공통분모를 찾은 것은 그 의미를 확대 해석할 만하다. 다른 이슈에서는 보·혁 갈등의 선봉에 설 수도 있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행동이라 하겠다. 커뮤니티 현안에 대해 모처럼 보여준 단체장들의 ‘어른스러움’이다.

이념논쟁의 잠재적 라이벌이 커뮤니티 권익옹호의 실질적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실증했다. 이날 모임은 바로 깨달음의 현장이었다. 문제는 이 깨달음이 찰나의 것이 아니라 한인사회 리더십으로 농축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인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지만 주류사회에 비하면 역시 보일락 말락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북한 핵, 이라크 파병 등을 놓고 갈라져 끝 모르는 입씨름을 벌이는 것은 ‘체력 소모’다. 급기야 주류 언론에까지 보도된 뉴욕 한인사회의 보·혁 이념 갈등은 타산지석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새 주지사로 공식 탄생했지만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기엔 난제가 너무 많다. 적자재정의 출구를 찾으려 하지만 묘수는 없다. 수입이 지출을 따라잡지 못하는 가정형편과 같다.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여야 한다. 둘 다 못하면 어느 하나라도 확실히 해야 한다. 증세 반대를 공약한 주지사가 택할 길은 뻔하다.

주지사는 오늘부터 ‘쭉정이’ 솎아내기에 돌입했다. 불요불급하다고 판정되면 가차없이 도려낼 것이다. 일례로 이중언어 프로그램이 온전히 유지될지 의문이다. 공공 프로그램 예산 삭감발표가 줄을 잇고, 칼날에서 비켜가려는 집단 이기주의가 발호할 것이다. 밥그릇 싸움 와중에 약체인 소수계가 덤터기를 쓰기 십상이다. 머지 않아 우리에게 떨어질 불똥이 무엇인지 간파해 이를 비켜가거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다.

슈워제네거 지지자라고 해서 희희낙락할 계제가 아니다. 주지사 취임식에 초대된 한인의 수에서 드러났듯 주지사와의 채널이 신통치 않은 우리로서는 안테나를 곧추세워야 한다. 방심하다간 한인사회가 예산 삭감 ‘예봉’의 주 타겟이 될 수 있다. 있는 채널 없는 채널을 총동원해 주정부 돌아가는 속사정을 파악하고 우리와 관련된 프로그램의 존폐 또는 축소 여부를 주시해야 한다. 다른 소수계 커뮤니티와 공조체제를 구축할 구상도 빼놓을 수 없다.

재외동포법 설명회에서와 같이 한인사회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이념이 달라도 머리를 맞댈 수 있다는 깨달음이 활어처럼 펄떡거렸으면 한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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