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메리타지 (Meritage)

2003-10-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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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마켓에 갔다가 우연히 클로 드 부아(Clos du Bois)의 97년 빈티지 메리타지인 ‘말스톤’(Marlstone)을 발견하고 가격도 체크해보지 않고 하나 집어들었다. 대형마켓에서 가끔 2000년, 1999년 빈티지 뒤에 먼지를 뽀얗게 쓴 채 숨어있는 98년이나 97년 빈티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캘리포니아산 카버네 소비뇽과 멜로는 1997년이 특별히 뛰어난 빈티지로 꼽히기 때문에, 2000년 빈티지 가격에 97년을 얻는 것은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똑바로 세워진 채로 1~2년 보관되었으니 코르크가 말라서 와인이 혹시 상하지 않았을까 약간 걱정이 되어서, 해물 파스타와 소비뇽 블랑을 마시려던 그 날 저녁 계획을 수정해서 스테이크와 함께 말스톤을 마셨다. 다행히 와인은 상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약간 밋밋하게 느껴지던 맛이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도 부드럽고 입안에서 달콤한 맛으로 녹아들면서 스테이크의 맛 또한 황홀하게 바꾸어 놓았다.

클로 뒤 부아는 캘리포니아주 소노마 카운티의 북쪽 알렉산더 밸리에 자리한 와이너리이다. 저렴한 가격의 클래식 시리즈부터 병당 50달러에 달하는 와인메이커스 리저브 시리즈까지 다양한 레벨의 와인을 고른 품질로 생산하는데, 그 중 말스톤이라고 따로 이름을 붙인 레드 와인 메리타지는 특별히 유명하다. 1997년 말스톤은 카버네 소비뇽 52%, 멜로 44%, 쁘티 베르도 4%를 혼합하여 만들었다.


이처럼 보르도 스타일 카버네 소비뇽 블렌드 적포도주를 레드 메리타지라고 하는데, 미국 내 여러 와이너리들은 각기 자신을 대표하는 메리타지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 중 많은 곳이 클로 뒤 부아의 말스톤처럼 따로 이름을 붙여서 판매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나파의 세인트 수퍼리(St. Supery) 와이너리에서는 카버네 소비뇽 67%, 멜로 26%, 페팃 베르도 4%, 카버네 프랑 3%를 혼합한 1999년 메리타지를 그냥 ‘레드 메리타지’라고 부르는데 반하여, 같은 나파의 플로라 스프링스(Flora Springs) 와이너리에서는 자사의 메리타지에 ‘트릴로지’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2000년산 트릴로지는 카버네 소비뇽 47%, 멜로 38%, 말벡 8%, 카버네 프랑 7%를 혼합하여 만들었다.

메리타지(Meritage)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 merit 와 heritage를 합친 것이다. 1988년 미국에 메리타지 협회가 만들어졌는데,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을 무엇이라 칭하여야 할 것인가를 공모하여 약 6천개의 응모된 명칭 중 선택된 이름이 메리타지이다. 이를 통하여 미국 메리타지 협회 회원들이 원하는 메리타지 와인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다. 품질이 우수하고 뛰어나며, 전통적인 프랑스 보르도 스타일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와인 레이블에 포도의 품종이 적혀 있는데, 표기된 품종이 적어도 75% 포함되어야 한다는 룰이 있다. 예를 들자면 카버네 소비뇽이라 표기된 와인이라면, 그 와인의 최소한 75%는 카버네 소비뇽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75% 룰은 각 와이너리와 포도밭에서 최고로 맛있는 와인을 생산해 낼 때 걸림돌이 되는 수가 많았고, 결국 와이너리들은 한가지 품종이 75% 미만이 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이같이 메리타지 협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메리타지 와인은 각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여겨지며, 그해그해 날씨와 여러 주변 환경에 따라 블렌딩하는 포도 품종과 비율을 바꾸어가며 좀 더 자유롭게 만드는 와인으로 이해되고 있다.

메리타지 와인은 꼭 레드 와인에만 국한된 명칭은 아니다. 보드로 스타일의 적포도주, 백포도주에 모두 메리타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메리타지 협회에서 정한 룰은 다음과 같다. 레드 와인이 메리타지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카버네 소비뇽, 멜로, 카버네 프랑, 말벡, 쁘티 베르도, 세인트 마케르, 그로 베르도와 카망메르 중 두가지 이상을 혼합하여 만들어야 하며, 한가지 품종이 90%를 넘어서는 안 된다. 화이트 메리타지는 소비뇽 블랑, 세미용, 소비뇽 베르 중 두가지 이상을 혼합하여 만든 와인으로 역시 한가지 품종이 90%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일 브랜드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오퍼스 원’도 메리타지라고 할 수 있고, 조셉 펠프스의 와인 중 가장 큰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인시그니아’도 메리타지 와인이다. 참고로 조셉 펠프스의 인시그니아의 경우 1999년 빈티지는 카버네 소비뇽 71%, 멜로 21%, 쁘티 베르도 6%, 말벡 1%, 카버네 프랑 1%로 만들어졌고, 1998년 빈티지는 카버네 소비뇽 78%, 멜로 22%로 만들어졌으며, 1997년 빈티지는 카버네 소비뇽 83%, 멜로 14%, 쁘티 베르도 3%로 만들어졌다.

그 외 잘 알려진 메리타지 이름으로는 콘 크릭(Conn Creek) 와이너리의 Anthology, BV 와이너리의 Tapestry, 로버트 크렉(Robert Craig) 와이너리의 Affinity, 저스틴(Justin) 와이너리의 Isoceles 등이 있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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