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국인이 좋아하는 와인

2003-09-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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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와인 생산지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인 만큼 와인 통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전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고급 와인 경매 중 영국의 경매시장이 와인의 가격을 사실상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향력이 큰 것은 물론이고, 영국인들의 와인 사랑과 와인 소비량 또한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런 영국인들이 이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 와인 도매상의 요청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제조되는 와인의 책임을 맡고있는 올해 57세의 존 아담스는 영국인들이 선호하는 과일향이 풍부한 와인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아담스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이 깊이 있고 와인다운 샤도네를 선호하는 반면 영국인들은 샤도네에서 향기로운 멜론과 무화과향을 기대한다. 한편 호주인들은 샤도네에서 백도의 향과 맛을 원하는데, 백도의 맛과 향을 내기 위해서는 좀 덜 농익은 포도를 사용하여 와인을 빚어야 하는 등 각기 원하는 맛과 향에 따라 포도의 수확과 혼합에서부터 달라지게 된다.

런던에 베이스를 둔 와인상 디렉트 와인(Direct Wine)이 1994년 호주의 아담스와 남아공화국의 윌리엄즈를 프랑스로 보내서 포도 수확부터 와인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공정을 책임지게 했을 때,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을 캉가루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나 곧 아담스가 하고자 하는 일이 단지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프랑스인들이 와인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 현지인들이 이제는 전적으로 그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다.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시야가 넓혀지는 계기가 된 이번 일로, 스스로 원하는 와인을 만들어가는 영국 상인들 덕에 판매와 유통에 대한 불안감에서 해방되었다며 반기는 표정이다. 이로 인하여 영국의 디렉트 와인이 구매한 이 지방 와인이 매년 200~300 헥토리터씩 증가하였고, 1986년에서 2003년 사이에 약 1만~1만3천 헥토리터의 판매량 증가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와인의 전통이 깊은 프랑스와는 달리 호주는 전통이 없고 와인의 역사가 짧다. 그러므로 호주의 와인메이커는 와인 ‘기술자’라고 불리우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만큼 새로운 기술과 방법의 시도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 존 아담스가 영국인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만들기에 프랑스인보다 더 적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샤도네는 특히 여러가지 스타일로 만들어질 수 있는만큼 열린 사고로 원하는 맛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이는 아담스가, 전통과 역사를 앞세우는 프랑스 와인메이커보다 영국의 와인 도매상으로부터 이 일에 더 적합한 책임자로 선택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와인에 대한 자존심이 남다른 프랑스에 호주인 와인메이커를 보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제조하게 하는 영국 상인들의 결정은, 손님이 왕이라는 자본주의적 사고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선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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