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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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콤플렉스

2003-09-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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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압은 220볼트다. 110볼트인 미제 전기제품을 들여와 덜컥 후크를 꽂았다가는 퓨즈가 단번에 나가 낭패 보기 십상이다. 반대로 한국제품을 미국에 가져와 후크를 꽂아도 작동 불능이다. 말하자면 전기 압력이 다르면 서로 상극이다. 요즘 한국에서 크게 유행하는 ‘코드가 맞는다’는 말도 전압이 같다는 뜻이다. ‘코드’란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정권 창출을 도운 ‘노무현 사람들’ 사이에 오간 이 말은 곧 ‘눈빛만 보아도 속을 알 수 있는 끈끈한 동지’를 뜻한다.

노무현 정권의 ‘키워드’는 그런 까닭에 단연 ‘코드’다. 사람을 선택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코드’는 핵심적 동기다. 다시 말해서 코드가 맞아야 사람도 쓰고 코드가 적중해야 정책으로 입안된다. 뒤집어 말하면 코드가 맞지 않는 인선이나 정책 결정은 없다는 뜻이다. 그 코드의 중심에 노무현 대통령이 있음은 물론이다. 권력의 모든 것은 ‘노무현의 코드’에 맞춰야 한다. 그 코드의 전압을 얼마나 잘 읽고 맞추느냐가 권력 실세의 바로미터다.

청와대 참모진 가운데 종종 엉뚱한 말을 내뱉는 이가 유인태 정무수석이다. ‘엽기 수석’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언행이 튀는 사람이다. 상식을 넘어선 말과 행동을 자주 보여 붙여진 이 별명을 그는 좋아한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엉뚱한 말 같지만 내막인즉 노 대통령 의중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참모임을 뽐내기 때문이다.


최근만 해도 그는 공직자, 특히 청와대 핵심 요직으로서는 하지 말아야할 상식 밖의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국회에서 김두관 행자부장관 불신임안을 통과시킨 데 대해 독설을 퍼붓더니,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요청한 미국 정부를 향해서도 ‘외교적 무례’로 해석되는 언어를 동원했다. 파병을 하고 안 하고는 정부 차원의 결정이 내려야 하고 이를 다시 국회에서 동의 받아야하는 절차가 있음에도 청와대 참모가 파병을 반대한다고 미리 선언을 하고 나선 것이다. 청와대 비서란 입이 있어도 없는 양 뒤에서 조용히 대통령을 보좌하는 자리인데도 말이다. 이 통에 청와대 대변인의 하루는 이 말 저 말 해대는 노 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튀는 발언들’을 해명하느라 영일이 없다.

정부 안에서조차 ‘청와대 엽기 수석’의 막 나가는 말에 머리를 흔들고 있지만 그가 기분 내키는 대로 입을 연 것은 아니다. 노 대통령의 코드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는 그가 한 말은 바로 대통령 심중을 대변했다고들 본다. 그래서인지 평지풍파를 일으킨 말을 해도 그는 핵심 실세 자리를 굳게 지키며 느긋해 하고 있다. 여론이 나쁘게 돌아가자 ‘술김에 한 말’이라고 해 ‘나라의 중대한 사안을 술 먹고 하느냐’고 국회에 불려나가 혼쭐나기는 했지만 그의 입지는 단단하다.

노 정권 안에서는 ‘코드’만 맞으면 웬만한 잘못도 용납된다. 야당이나 여론의 비난쯤 문제될 게 없다. 국회 불신임을 받은 김두관 전 행자부장관 경우가 그렇다. ‘젊은 노무현’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갖고 있는 김씨가 국회의원들을 쓰레기라고 욕하면서 불신임을 받고도 보름을 버틴 것은 노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일설에는 차기 대통령 감으로 점을 찍어 놓았다는 말도 듣는 사람이니 ‘코드’로 치자면 유인태 수석을 능가한다는 평도 나돈다.

사태가 이 지경이다 보니 정부 고위직들은 어떻게 하면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나 노심초사다. 최근 태풍이 몰아칠 때 제주도에서 골프 휴가를 즐기다 들통이 난 김진표 경제부총리의 태도도 그 한 예다. 1백여명의 인명피해와 수조원의 재산피해를 몰아 온 초특급 태풍이 사전에 예고됐음에도 제주도로 훌쩍 휴가를 떠나더니 한반도 상륙이라는 경보음이 울릴 때까지 느긋하게 필드를 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평소 ‘코드’를 잘 조율한 데다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도하려는 한 비판신문을 향해 기사를 함부로 썼다가는 고소당할 줄 알라며 오히려 공격하는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태풍이 상륙한 당일 노 대통령 자신이 가족들과 뮤지컬을 관람하고 있었다니 부하 목을 자를 수야 없을 듯도 하다.

노 대통령이 진정한 지도자로 서려면 ‘코드 콤플렉스’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220볼트’에만 맞는 ‘코드 정치’를 해선 안 된다. 전압이 다른 110볼트 제품도 함께 쓸 수 있는 ‘컨버터블’(전압 자동 조절기)을 갖춰야 한다.

안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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