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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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해야 하는 이유

2003-09-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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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차 국경을 넘어 멕시코 왕래를 100회를 넘게 해 왔다는 한 여성은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의 위력을 누구보다 실감했다고 한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 땅으로 들어가는 일인데 검문소에서 여권을 보자고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차를 세우고 운전면허증을 꺼내 검문요원의 얼굴에 들이밀기만 하면 무사통과란다.

운전면허증은 운전석에 앉았을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마켓에서나 관공서에서도 신분확인을 위해 가장 먼저 요구되는 ‘증’이다. 깜박 잊고 집에 두고 나오기라도 하면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암행어사 마패는 아니지만 맘 편안하게 살아가는 데는 변호사자격증, 의사자격증보다 더 쓸모 있는 ‘증’일 수 있다.

불법체류자들을 애태우던 것이 바로 운전면허증 취득불허 규정이었다. 그런데 실정으로 소환 위기에 몰린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가 이들에게도 운전면허증을 줘야 한다는 법안에 서명했다. 그는 따가운 햇빛 아래서 온종일 농장 일을 하는 수많은 불법체류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자고 호소했다.


운전면허증을 불법체류자들에게도 주는 것은 불법이며, 합법적으로 미국에 오려고 수년씩 기다린 이민자들과 테러 이후 엄격해 진 비자심사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당한 특혜로 비쳐진다.

이에 대꾸할 논리가 궁하지만, 그래도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부여하자는 인도주의적 간구를 거부하긴 어렵다. 불법체류 신분이지만 미국에 온 뒤 줄곧 성실하게 살았다면, 합법체류자도 살면서 크고 작은 위법을 저지른다는 점을 감안해 관대하게 대할 수 있다.

데이비스는 서명하면서 불법체류자들이 캘리포니아 경제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자고 했다. 이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처럼 염가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들이 합법체류 주민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인구급증 사태를 불러 대기오염, 수질오염, 주택난, 콩나물 교실, 교통체증을 유발해 캘리포니아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볼멘소리는 일리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불황에 그나마 야채와 과일 등을 비교적 싸게 사먹을 수 있는 것은 상당 부분 불법체류자들 덕이니 이들에게 운전면허증을 주자는데 펄펄 뛸 일은 아니다.

데이비스는 불법체류자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운전시험을 보게 함으로써 도로안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고만장했다. 무면허 운전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들 중 대다수가 면허를 취득하면 무보험 차량들이 대거 도로에 쏟아져 나오는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란 지적이 튀어나온다. 이에 수긍이 가지만, 가족 부양을 위해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려는데 운전면허증을 딸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먼길을 버스를 타고 또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 면허증을 받게 된다면 보험 들고 차를 몰려는 사람들을 현재 불법신분이라고 해서 도매금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

불법체류자 운전면허 취득 허용은 법이 됐지만 갑론을박은 계속될 것이다. 주지사에 당선되면 이 법을 원상으로 환원하겠다고 공약하는 후보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법의 탄생과 관련해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데이비스 주지사의 태도가 그것이다.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는 치안 당국자들의 안보 우려를 받아들여 유사한 법안에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할 정도로 열렬한 반대파였다.

지금 외국인에 의한 안보 위협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또 불법체류자들의 경제적 기여도가 지난 수개월간 급상승한 것도 아니고 이들의 인권이 더 유린된 것도 아니다. 상황은 같은데 데이비스의 입장만 180도 바뀐 것이다. 소환선거에서 히스패닉 표를 겨냥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이비스는 소환돼야 한다. 자신이 소환투표에 회부된 데 대한 민심을 파악하고 이를 아우르고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생각보다 서바이벌게임에만 혈안이 돼 있다. 데이비스가 이번 고비를 무사히 넘기면 남은 임기 중 주민 복리보다 개인 영달을 우선 시하는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앞세우는 교활한 정치인보다는 진정 주민을 위하는 어눌한 지도자가 낫다. 잘못된 지도자를 솎아내는 데 당적이 고려사항이 돼선 안 된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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